국어교사 임무출(53.경산 진량중)씨는 단어에 묻혀 산다. '감떼는 사납다' '는실난실' '낙짜는 없다'…. 어휘사전을 화두로 붙들고 씨름한 지 벌써 9년. 귀가하기 무섭게 고단한 몸을 추스리고는 하루 3~4시간씩 일일이 작품 원본과 사전을 번갈아 들춰가며 어려운 어휘들을 옮겨 적고, 뜻을 풀이해 차곡차곡 기록해 둔다. 그 흔한 컴퓨터도 없이. 그의 말대로 이 일이 이제는 유일한 취미이자 학자로서의 필생의 의무가 된 셈이다.
그런 그가 최근 꼬박 2년을 작업한 결과를 책으로 냈다. '김유정 어휘사전'(박이정출판). 소설가 김유정의 전 작품(31편)을 모두 읽은 후 난해하고 생소한, 심지어 사전에도 없는 어휘들을 가시 바르듯 하나씩 발라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책이다. 97년에 펴낸 '채만식 어휘사전'에 이은 두번째 어휘사전. 이전에도 그는 '염상섭의 만세전.삼대 어휘해석'과 '속담.고사성어 사전'을 낸 바 있다.
김유정의 64번째 기일(3월 29일)에 맞춰 출간된 이 어휘사전은 전공자들도 해독하기 힘든 김유정 특유의 입말들을 빠짐없이 풀이하고, 용례까지 덧붙여 정리한 것이다.
"원고는 일찌감치 마무리됐지만 도무지 책으로 엮어줄 출판사가 없어요. 경제성이 없다나요. 여러차례 출판사측을 설득하고 재촉해 겨우 출판했습니다".
'채만식 어휘사전'과 마찬가지로 이번 '김유정 어휘사전'도 출판사 대표가 그의 기일에 맞춰 춘천에서 열린 추모제를 찾아 김유정기념사업회에 책을 헌정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위로가 되지만 임씨로서는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이 더 앞선다.
"어휘사전에 승부를 걸었어요. 주위 사람들에게서 입은 은혜를 이것으로 보답한다는 심정으로 시작한 일입니다".
그가 단어의 세계에 빠져든 것은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우연히 듣게된 학생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채만식의 '탁류' 독후감을 과제로 냈는데 학생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반응이 귀에 날카롭게 박힌 것. "교수님도 한번 읽어보세요. 이해가 되는가…". 꼼꼼히 읽어보니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작업이 우여곡절끝에 하나씩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김유정 어휘사전'이 완성되기까지 어려움도 없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휘들을 찾아, 유정의 작품속에 수없이 등장하는 구수하고 감칠맛나는 입말의 본산을 찾아 그의 고향 영서지방(춘성)을 수차례 방문했다. 더러 "외지사람이 고맙구먼. 우리가 부끄러울 따름이야"라는 반응도 있었지만 어휘와 씨름하느라 입은 마음고생은 아무도 모를 터다. 어쨌거나 하루도 빠짐없이 임씨는 어휘와 씨름한다. 현재 그의 손에 쥐어진 어휘는 김동인의 전 작품에 나오는 것들이다. 벌써 3분의 1정도 진척됐다. 이번에는 또 다른 벽이 버티고 서 있다. 김동인 작품에 등장하는 숱한 평양사투리와 궁중용어. 영 모르는 단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이력이 난 탓에 그래도 수월한 편이다.
외길을 고집하느라 곁눈 팔 시간도 없었지만 뜻을 같이하는 동지도 있었다. 부천대 민충환 교수다. '임꺽정 우리말 용어사전'을 낸 민 교수도 이 작업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알고 있는 터여서 임씨와 서로 역할분담을 했다. 민 교수는 살아 있는 작가쪽으로, 임씨는 작고한 작가로 영역을 정한 것. 뿐만 아니다. 우리나라 작가의 소설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있는 어느 독문학자는 임씨에게 열심히 조언을 구한다. 한국사람도 모르는 어휘를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어찌 힘이 들지 않겠는가. 수차례 질의, 답변을 하면서 임씨는 자기가 아는 것은 빠뜨림없이 꼼꼼하게 챙겨준다.
"급조한 사전이 판을 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전마다 뜻풀이가 들쭉날쭉 서로 다르고…. 옥스포드 사전은 150년에 걸쳐 제작했답니다. 단어보다 용례가 수백배 더 많은 사전이 부럽기만 합니다. 국가적인 출판 지원도 아쉽고요".
어휘사전에 매달려있느라 임씨는 10년 가까이 주말 나들이 한번 가지 못했다. 그만큼 가족들의 희생도 따랐다. 하지만 학생들이 우리말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라고 그는 대답했다. 요즘 날이 갈수록 손에 힘도 빠지고, 눈도 침침해오지만 '가장 체계적이고 상세한 어휘사전'을 향한 그의 열정은 쉽사리 숙지지 않을 것 같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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