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음력 4월5일)은 대구가 낳은 위대한 시인 상화(尙火)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 일제의 칼날에 맞선 저항시로, 나라잃은 민족의 해방을 부르짖은 독립투사로, 학생들에게 민족을 깨우쳐주던 스승으로 짧은 생을 불태운 시인 이상화(李相和). 빼앗긴 땅에 소생의 봄을 목놓아 불렀던 민족시인 '상화'를 배출한 대구는 그가 태어난지 한세기가 되도록 불멸의 정신을 이어갈 기념관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유산이 바로 도시의 경쟁력이 되는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려나가기 위한 첫걸음으로 상화를 재조명한다.
편집자
지금부터 꼭 58년전인 1943년 4월25일 아침결인 오전 8시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바싹 야윈 43세의 상화는 힘없이 몇마디 입속말을 지순한 아내 서순애(徐順愛·84년 작고)에게 건네고 영면의 길을 떠났다. 큰아들 용희씨가 18세(작고, 당시 중학생), 충희(현 서울 거주, 흥국공업주식회사 명예회장)씨가 10세, 막내 태희(서울 거주)씨가 6세였던 때였다. 정월에 위암으로 판명된지 불과 석달만에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그렇게 급하게 떠나버렸다. 그해 2월 중순 만주로 떠나기 앞서 목우 백기만(시인, '고월과 상화'의 저자)이 계산동 고택으로 병문안을 가보니 벌써 눈빛만 형형한채 여윌대로 여위어 있었다."집필하려던 국문학사를 탈고나 해놓고 죽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틀린 모양이지…".
서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왜놈들한테 무릎꿇지 않았고, 창씨 개명을 거부했으며, 고초를 겪는다고 동지들을 밀고하지도 않았던 불굴의 상화였지만 병마앞에 그렇게 힘없이 무너졌다. 민족을 위해 해야할 태산같은 일들을 다 남겨두고….민족의 큰별이 뚝 떨어져버린 슬픈 그날 이후 상화는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월성 이씨 가족묘지에 안장돼 울창한 소나무숲에 잠들어있다.
그해 가을 시인 백기만, 서동진, 화가 박명조, 김봉기, 이순희, 주덕근, 이흥로, 윤갑기, 김준묵 등 해방 전후 공간의 대구를 정신적으로 이끌던 지인 10여명이 힘을 합쳐 묘비를 세웠다. 묘비명은 상화가 주권을 빼앗긴 민족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 초기에 스스로를 귀머거리, 벙어리로 지칭한 호 '백아'(원래 白啞인데 묘비에는 白亞로 새겨짐)를 써서 '시인백아월성이공위상화지묘'(詩人白亞月城李公諱相和之墓)라고 새겨져있다.
교남학교(현 대륜학교 전신) 교사 시절, 수업시간에 관동대지진의 참상과 일본의 실상을 제자들에게 들려준 게 단초가 돼 출근길에 일본 형사들에게 끌려가서 대구형무소에서 수개월간 고생, 결국 단명으로 이어졌음을 아는 지인들은 왜경의 눈을 피해 그렇게 간략한 묘비로 섭섭함을 달래며 민족의 울분을 삼켰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詩碑)로 대구 달성공원에 들어서 있는 상화시비는 1948년 3월 김소운의 제청으로 시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고 이윤수 시인 등 대구 '죽순' 동인들이 발벗고 나서서 건립됐다. 이 시비에 비로소 국민시인 상화의 의기로운 기록과 대표시 '나의 침실로'를 새겨, 영원한 생명의 길인 좁은 문, 험난한 길을 고고히 걸어갔던 시인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젊은 한때 방황도 있었지만 40평 민족을 안고 궁글었던 '상화'는 일제가 침략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1901년 5월9일(음력 4월5일) 대구부 본정 2정목(大邱府 本町 2丁目) 11번지(현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현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뒤편)에서 태어났다. 다들 현재 서성로의 상화 일족집을 상화의 생가로 잘못 알고 있으나 대구시 중구청에서 상화의 제적부를 확인하고, 중구청 지적계장과 동반 답사한 결과는 달랐다.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태어나 43년에 타계하기까지 상화가 서울 유학시기와 도쿄 체제 기간을 빼고 상화가 대구에서 머문 거처는 생가와 유명을 달리한 고택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군데로 최종 확인됐다. 이제까지 상화의 백부인 소남공 이일우의 직계가 사는 서성로(조흥은행 뒤편)가 상화의 생가로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상화의 제적부와 자필 이력서(대륜고교 소재) 등의 확인을 통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아직 상화에 관한 기초 자료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음을 방증함에 다름 아니다.
서문로 상화 생가 사랑방은 담교장(談交莊)으로 일컬어졌다. 상화의 당호를 따서 담교장으로 불리던 이곳은 스스로 애국지사요, 항일을 자처하던 20여명들의 모임처요, 시국 토론장이었다.
젊은 혈기에 피압박 민족의 통탄과 좌절을 지기들과 함께 술로 달랜 4, 5년 세월의 결과는 상화의 가산 탕진과 건강악화로 이어졌다.
맏형 이상정 장군의 집에 나란히 딸렸던 113평 궁궐같은 서문로 생가를 판 상화는 33년에 대구시 중구 장관동(대구부 西千代田町) 50번지에 살았으며, 34년에는 대구시 중구 남성로(대구부 남성정) 35번지에, 다시 38년에 대구시 중구 종로(대구부 경정) 2가 72번지로, 40년에는 마지막 거처가 된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대구부 명치정 2정목) 84번지로 이사를 다니는 곡절을 겪게 됐다. (대구시 중구청 제적부 추적 결과)
이 가운데 상화가 숨진 계산동 2가 84번지 고택(1925년 신축)은 상화가 숨지던 안방, 친구들과 제자들을 맞던 사랑방, 울적한 마음을 달래던 감나무, 손님들로 벅적이던 살평상이 놓인 자리 등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있어 더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랑방 이곳에서 원고 심부름을 나온 저를 맞아주던 선생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김동춘(82) 시인은 회고했다. 제자들은 이제사 상화의 대구거처 다섯곳을 확인하자 "대구가 이게 뭐꼬?"라고 개탄했다.
도움 주신분=상화가 교남학교에 만든 권투부 '태백구락부'(회장 정원용), 전 대륜고 교장 이성수 시인, 대구시 중구청 민원실과 지적계.
최미화기자 magohalm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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