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마늘 밭에는 적막감만 감돌고 있었다. 밭뙤기 상인들은 발을 끊었다. 일부 농민들은 "이럴 지경에 비료는 줘서 뭣하겠느냐"며 보기조차 싫다며 들을 등졌다. 전국 최대 마늘 산지 의성, 역시 내로라는 양파 단지인 경남 창녕과 경북 영천이 마찬가지였다. 거둘 날은 불과 한달여 앞으로 다가 왔지만, 들을 지키고 있는 것은 그저 적막감이었다.
◇농부들 삽을 놓다 = "값 떨어질 게 뻔해 봄가뭄으로 타들어 가도 양파밭에 물대고 비료주는 일조차 진작 포기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천 신령면 화남2리에서 양파 900평과 마늘 1천600평을 재배한다는 황석주(60)씨는 자신도 진작부터 양파밭 물대기 작업을 중단해 버렸다고 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파 작황은 올해 유별나게 좋다.
2천평 양파 밭에서 풀을 뽑던 화남1리 박정금(68) 할머니에겐 괜히 물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손을 놔 버렸던 것이다. 화산면 대안리에서 1천500평의 양파 농사를 짓는 윤성열(53)씨는 "양파가 무슨 죄가 있느냐. 그래도 비료는 줘야지"하며 허탈해 했다. 의성읍의 신상익(45·오로리)씨는 "마늘을 과연 뽑아 보관해야 할지부터가 혼란스럽다"고 했다.
창녕군 유어면 미수리 정문호(46)씨는 "비료.농약.종자 값을 어떻게 갚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마늘 9천평과 양파 6천평을 농사 지었다는 인근 대지면의 강병희(38.창산리)씨는 "마늘이 안팔려 빚 이자 갚을 길이 막막해 도망이라도 가고 싶다"고 했다. 오는 1일은 '창녕 농업경영인의 날'이니 그에 맞춰 '농업경영인 빚잔치'라도 해야 할 판이라는 얘기였다.
◇밭뙤기 상인은 어디로 갔을까? = 영천 신녕면 완전2리에서 양파.마늘 농사를 짓는 임차암(71) 할아버지는 "값 폭락 소문 이후 상인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겼다"고 했다. 양파 농사.저장.판매 경력이 30년이나 돼 '신녕의 양파 전문가'로 통하는 정대만(57.화성3리)씨는 "상인 구경도 하기 힘들 걸"이라고 단언했다.
닷 마지기(1천평)에 마늘을 심었다는 의성 사곡의 이진곤(66.오상1리)씨는 그대로 밭뙤기 상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의성마늘 영농법인 김봉운(54) 조합장은 "상인들이 판세를 더 잘 아는 것 아니냐"고 했다. 마늘 2천평을 심었다는 봉양면의 신동석(44·장대리)씨는 "밭뙤기가 안되니 사고로 입원한 아내 치료비, 자녀 학자금 등을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마늘 밭에 물을 퍼올리던 창녕 대합면의 박재승(54.소야리)씨는 "작년 이맘때는 벌써 20∼30%가 밭뙤기 거래됐는데…"라고 옛날을 그리워 했다. 이웃 마을에서 1만2천평에 마늘을 심었다는 박세만(40.창산리)씨는 "값이 떨어지니 마늘 쫑대 가지러 오는 사람들 조차 발길을 끊었다"고 허탈해 했다.
상인들은 그들대로 고민이 많다고 했다. 위험성을 알면서도 사야할 지, 포기해야 할 지 판단이 어렵다는 것. 사지 않는 것은 생업 포기와 같기 때문이다. 연간 50t의 마늘을 거래해 의성에서는 '큰 상인'으로 불리는 김종학(54)씨는 "밭뙤기 상인들은 작년에도 마지기(200평)당 20만∼30만원씩 손해 보고 처분해 올해는 쉽게 발을 들여 놓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가 점치는 가격은 마지기당 60만∼70만원, 좋아야 100만원 선이었다.
외지 상인의 위탁을 받아 창녕읍에서 밭뙤기 수집을 해 왔다는 김삼년(43.교하리)씨는 "마늘밭 15ha 정도를 사들이려다가 수입 발표가 있은 후 5ha만 산 뒤 중단했다"고 했다.
◇옛날과는 달라진 상황 = 전에는 지금과 상황이 또달랐다고 농민들은 말했다. 과잉 생산돼 그냥 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몇년에 한번은 시세가 좋아져 그것까지 만회할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지금은 조금만 값이 좋다 싶으면 곧바로 수입돼 버린다. 패농을 만회할 기회 조차 박탈당했다는 얘기.
그렇다면 결국은 농업 포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싶었다. 의성.영천.창녕 등 농민들이 돈을 마련할 수 있는 작목이라고는 양파.마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젊은 축에선 겨울 하우스 농사도 하지만, 거개는 생활비, 자녀 교육비, 혼사비용 등을 전적으로 마늘.양파에 기대다시피 한다고 했다.
의성 안평농협 이원희 조합장은 "이런 상황이라면 농촌 인구마저 더 줄지 않겠느냐"고 이농까지 우려했다. 창녕 유어면의 조명구(41.세전리)씨는 "빚 이자조차 못주게 고질화돼 버린 뒤에는 밤 도망을 놓는 농민까지 있고, 그런 뒤에는 보증인도 따라 망한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의성군청.농협.농민모임 등은 지난 27일 △추가 수입 마늘의 국내 유통방지 △한지마늘 최저 보장가를 1천850원에서 3천원 이상으로 인상할 것 △농가 희망 전량수매 등을 요구하는 문서를 만들어 무역 관련 중앙정부 부처, 여야 정책위 의장 등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창녕.조기환기자 choki21@imaeil.com
영천.서종일기자 jiseo@imaeil.com
의성.이희대기자 hdlee@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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