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선운사에서'

꽃이 아침 비에 지고 있다. 지난 겨울 혹한을 견뎌내고 피워올린 그 어떤 힘이 봄비에 지고 있는 것이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것은 이처럼 금방이다. 허망한 일이다. 사람은 꽃과는 다른가 보다. 아니 사랑은 다른가 보다. 꽃이 쉬이 지는 것처럼 가슴 속에 맺힌 연애도 쉽게 지면 얼마나 좋을까. 꽃 지듯 쉽게 지지 않는 게 인간의 마음인가 보다. 그래서 '상처'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남는지 모른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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