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 운동장이 비어 버린 것은 이미 몇 년 된 일. 그러나 요즘 들어 더욱 걱정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일하다시피 한 놀이 시간인 점심시간에조차 운동장이 비어 버리는 것.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중.고 병설학교, 학급 수가 많은 학교 등은 거의 그렇다.
1999년 이후 학교 급식이 고등학교까지 급속히 확대된 뒤 나타난 현상. 좀 복잡한 설명을 곁들여야 학부모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원초적인 문제는 학교마다 식당 크기는 한정돼 있는 데 밥 먹어야 할 학생 숫자는 많다는 점. 4교시를 끝낸 후 한꺼번에 전교생에게 동시에 밥을 먹이기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학년마다 밥 먹는 시간을 다르게 하는 형태. 예를 들어 3학년은 본래 점심시간에 밥을 먹게 하되, 1.2학년은 3교시에 급식하는 식이다.
점심 먹는 시간을 뒤바꿔 놨으니 이것만 해도 자연스러움을 잃은 것. 하지만 더 곤란한 문제가 뒤따른다. 3교시에 공부 대신 밥을 먹은 학생들이, 남는 시간 동안 종전에 하던 운동장 놀이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운동장에 나가 봐야 다른 학년 학생들이 체육시간 수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학생들의 태도에도 일부 원인은 있는 모양이다. 덕원고 이성한교장은 "체육교사들의 양해를 구해 수업 외 아이들에게도 운동장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지만 귀찮다며 외면한다"고 했다. 식당 청결을 위해 실내화를 신도록 하는데, 운동장에 나가려면 교실로 가 다시 운동화로 갈아신고 나가야 해 번거롭다는 이야기이다.그래서 일부 학교는 강당을 개방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비좁다. 한 체육교사는 "강당 농구코트는 한정돼 있는 데 아이들이 너무 몰리다 보니 자리 싸움까지 잦다"고 했다. 사고 위험도 있고 해서 아예 학년별로 돌아가며 배정한다는 설명.
점심시간에 한 고교에 가봤다. 학생들은 그저 건물 주변을 어슬렁거리거나, 나무밑.벤치 등에 삼삼오오 모여 떠들어 대고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호각소리에 맞춰 달리기 하는 모습이 보였다. 체육 수업시간 중이었다.
사정과 형태는 다르지만, 초등학교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초교에서는 급식을 거의 각 교실에서 한다. 운동장 걱정은 없는 것. 그 덕분인지, 밥을 먹은 뒤 많은 어린이들이 운동장을 내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구 서구의 한 초교는 달랐다. 점심시간인데도 복도에서조차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밥통을 옮기던 '배식 당번'에게 물으니, "밖에 나다니면 혼난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모두 책을 읽도록 돼 있다는 것. 교장은 '독서지도'를 학교의 특색사업으로 꼽으며, "점심시간에 운동장보다 복도에서 노는 아이들이 많아 이렇게 했다"고 설명했다. 조용히 책 읽기를 바라는 아동들도 있으니, 시끄럽게 떠드는 건 단체생활의 기본도 모르는 행동이며, 교육적 차원에서 지도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그러나 한 초교 교사의 생각은 달랐다. "운동장에 아이들이 없다는 건 아이답지 못하다는 거죠. 뛰어 놀 나이에 학원이다 공부다 쫓기는데 고른 성장이 될 수 있을까요? 교실이 붕괴된다느니 학교가 죽는다느니 하는 말도,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성장 여건을 만들어 주지 못해 비롯되는 것 아닐까요?"
뎅 뎅 뎅… 종이 울리면 운동장으로 달려나가 흙먼지 풀풀 날리며 공 차던 아이들. 미끄럼틀이다 그네다 철봉이다 해서 그저 매달려 있기만 해도 좋았던 시절, '이병'이네 '오징어 가생'이네 하며 국적도 모르는 놀이에 해 지는 줄 몰랐던 아이들. 그들은 이제 없어졌다. 운동장에 남은 건 체육시간뿐.
그리고 수업이 끝난 아이들은 바쁘게 학교를 빠져나간다. 일부는 학원으로 간다. 학교보다 먼저 배우고, '더 만족스럽게' 배우며 오후를 보낸다. 뛰어 놀 시간은 없다. 그저 가까운 친구들과 장난치거나 재잘거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학교에서 PC방으로 직행하는 아이들도 많다. 운동장에 금 그어놓고 하던 땅 따먹기가 아니라, 세계.우주를 넘나드는 컴퓨터 전쟁놀이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런 양태는 초중고생을 가리지 않는다. 한 중학교 교사는 "요즘 아이들은 몸을 움직이며 놀 줄 몰라 허우대만 멀쩡하지 속은 수수깡"이라고 했다. 음란물 단속을 많이 해 PC방에 가서도 대부분 게임에만 몰두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얘기였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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