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깜빡 깜빡 아! 건망증

깔끔하고 깐깐한 살림을 하기로 소문난 주부 김모(48)씨. 오랜 시간 공들여 화장을 하고는 백화점 쇼핑에 나섰다가 큰 낭패를 당했다.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에 거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양쪽 눈썹에, 그것도 선명하게 빨간 립스틱이 칠해져 있지 않는가? 얼굴이 불을 끼얹은듯 화끈거렸고 쥐구멍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인의 생활탓일까. '건망증'을 호소하는 주부들이 부쩍 늘고있다. 전문가들은 주부들이 가정 안팎으로 너무 많은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대체로 남편들보다 건망증이 더 심하다고 말한다. 매달 결제해야 하는 은행 적금과 고지서, 아이들의 이런저런 학교 행사, 친인척 어른들 생신, 제사…. 일일이 기억해야 하는 행사만 해도 부지기수. 빠듯한 남편월급에 나가야할 돈은 많아 요리조리 맞추다보면 머리가 '띵'해지고, 매일 반복되는 집안일에 대한 스트레스도 건망증을 부추긴다.

사실 집안 일이라는 게 하루종일 허리가 부러져라 일해도 표시가 나지 않는 일들이다. 잘해야 본전일 뿐이다. 청소, 빨래, 설거지 등 평소엔 모르다가도 한번만 미뤄지면 금방 집안이 엉망이 되고 가족들의 비난이 날아온다. 그러면서도 왜 허리가 아픈지 알아주는 가족은 없다. 야속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늘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야하는 주부들의 애환이다.

주부건망증이 이유없이 심해지는 것이 아니다. 통화가 끝나고 태연히 무선전화기를 냉동실에 넣질 않나, 전기밥통에 스위치를 누르지 않아 온 식구를 굶기기도 한다.

결혼후 15년 넘게 한 눈 팔지 않고 전업주부로 충실히 살아왔다는 정경희(43·대구시 서구 평리동)씨. 그 덕에 두 아이 모두 잘 컸고, 그걸 행복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나 어느 날 불쑥 찾아온 건망증은 실수를 연발케 했고 그녀에겐 큰 충격이었다. "건망증이 심하면 치매가 잘 온다는데 혹시…"

그러나 전문가들은 건망증과 치매는 발병원인과 진행과정이 다르다고 말한다. 쉬운 예로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말문이 막히는 것은 건망증, 전혀 엉뚱한 단어를 사용해 상대방을 황당하게 만드는 경우는 치매를 의심케 한다. 잘 잊어버린다는 그 자체만으로 괜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생리적인 노화현상일뿐 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웃고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는 일. 건망증은 심리적 요인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가정생활의 불만, 불안정한 미래가 깜박깜박증을 악화시킬 수 있다. 때문에 심한 건망증이 있을 땐 가족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모든 집안 일을 혼자서 도맡아 처리하려 들지 말고 남편과 아이들의 도움을 당당히 요구하는 것이 좋다. "여자들은 나이 먹으면 원래 그래"라고 내뱉는 무심한 남편들은 아내의 건망증을 도리어 부채질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박운석기자 stoneax@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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