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상화기념관 건립사업 표류

향토가 낳은 대표적 민족시인 상화시인의 기념관 건립사업이 표류하고 있다. 상화시인이 대구에서 머문 곳은 전부 대구시 중구청 관내.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태어난 이래 대구시 중구 장관동 50번지, 대구시 중구 남성로 35번지, 대구시 중구 종로 2가72번지로 옮겼고, 마지막으로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 구 효성초교 뒷쪽 고택에서 타계했다.

본보 4월27일자(상화 시리즈 제1회 상화의 흔적찾기 참조)에서도 밝혔듯이 이미 다른 4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태어난 곳은 한옥이 있기는 하지만 옛날 상화가 살던 집이 아니라 50년대말에 3개의 집으로 나뉘어 새로 지어져버렸고, 둘째 장관동 50번지는 대구한약재도매시장과 약령시기념관으로 가는 길목으로 지금은 영동한약도매약업사가 들어서있다. 영동한약도매약업사의 단층 건물의 내부가 한옥이기는 하지만 대들보에 쓰여진 건립연대가 60년대이어서 종전에 상화가 살던 그집은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또 세번째 거처인 대구시 중구 남성로 35번지는 약전골목 세명당 약업사의 옆뒷건물(종전에 삼천리자전거 상회 뒤편 창고)로 사람이 거처하지 않는 창고인데, 지금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다 썩은 함석담이 골목과의 경계를 지킬 뿐이다.

네번째 거처인 중구 종리 2가 72번지는 현재 종로가구골목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은 신세계 자개공예사가 들어서있다. 대구화교학교와 이웃한 네번째 거처는 그대로 보존만 했다면 화교학교의 고풍스런 건물과 어울려 명소가 됨직도 하지만 아쉬운 상상만 허락할 뿐 시인의 흔적은 깡끄리 사라져버렸다.

마지막 거처이자 상화 시인이 살아숨쉬던 현장이 고스란히 보존돼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 고택. 이곳은 상화시인이 교남학교에서 무료강사를 하던 때를 포함해서, 암으로 타계하기까지 마지막 3년 내외를 산 곳이다.

원래 이곳은 상화 백모의 집이었으나 살림이 빈한해질수록 민족정신은 더욱 뚜렷해지고, 후세 양육으로 민족을 지키려던 상화시인이 타계한 바로 그곳이다.

단한번도 친구를 물리친 적이 없을 정도로 넓은 포용력을 지닌 상화시인이 어느날 집에 모인 친구들을 물리치고 들어가서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버린 자그마한 안방, 아내 서씨의 품에 안겨 숨지면서 바로본 천장, 민족의 앞날이 암울할 때면 계산성당을 건너다보던 안방 들문, 문인·지기들과 교류하던 손바닥만한 사랑방, 나라를 빼앗긴 울분으로 잠이 오지 않는 여름밤에 총총한 별을 보며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던 정원 옆 살평상이 놓인 자리, 상화시인이 그렇게 좋아했던 감나무 두그루(한그루는 죽었음), 아내 서씨의 손때가 묻은 정겨운 장독대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금도 안방들문을 열면 계산성당의 시원한 바람이 그대로 밀려들어오게 돼있고, 대청마루 춘양목 대들보에는 을축년에 지은 집이라는 표지가 선명하다.

상화고택이 비교적 변형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은 이곳에 사는 이금주씨의 아들 김태형(누리미디어 과장)씨의 상화시인을 향한 순수한 열정 덕분이다.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으로 지금도 국학을 전산화하는 일을 하고 있는 김씨는 어린시절부터 이집을 들락거리던 고 이윤수 시인등이 "이곳이 상화시인이 돌아가신 곳, 저곳이 상화시인이 거닐던 곳, 지인들을 만나던 곳, 글을 쓰던 곳" 등으로 얘기하던 것을 듣고 어머니에게 집안에 못하나라도 함부로 치지 못하도록 당부를 드렸다.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이라도 이곳을 제대로 지켜드리는게 후손으로서의 의무라고 자발적으로 결심하고, 흔들림없이 지켜오고 있다.

"살림에 쪼들려 사랑방을 고쳐서 세라도 놓으라치면 아들이 절대 안된다"고 막아서 그 뜻을 받아들였다는 이씨는 "애들을 키우느라고 위험해서 우물을 막았지만 우물물이 참 맑아서 복원하면 얼마든지 물이 나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씨는 "상화의 후손인 이재철씨도 이따끔씩 찾아와서 한참을 울먹이다 간 곳"이라고 말하지만 유족들은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채 이곳에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상화는 유적들의 상화가 아니라 대구의 상화, 민족의 상화이다.

상화시인의 계산동 고택은 공교롭게도 같은 교남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던 한솔이 이웃에 살았고, 상화시인의 고택 한집 건너 옆집은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인 서상돈의 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상돈의 집으로 알려진 한옥은 겉으로 보기에는 낮고 허름하지만 대문채에서 들여다본 집마당에 아름드리 나무가 서있고, 넓이도 백여평은 족히 됨직하여서 서상돈의 집인지의 여부를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이렇게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는 상화시인의 고택이 기념관으로 재단장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단한가지. 대구시의 의지부족과 대구시민의 문화마인드 부재 때문.

대구시는 상화고택을 매입하기 위하여 지난해 예산까지 세워두었으나 고택매입에 실패, 불용예산으로 도로 시에 반납해버렸다. 대구시가 추진하는 상화기념관 건립사업은 상화고택의 매입과 인근 주택까지 매입하여 주차장으로 만들겠다는 것. 그러나 상화고택에 대한 대구시의 예산은 1억6천만원이 책정돼있으나 상화고택에 사는 현 거주자들은 3억1천만원(61평, 평당 5백만원)을 받기를 원해서 기념관 건립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특별히 의미가 있는 집을 고스란히 지켜온 것을 감안, 감정할 때 감정가를 조금 조정하는 기법도 있을 것이고, 정 안되면 차액을 시민모금운동을 통해서라도 조달할 수 있지 않느냐"는 대구시민들은 상화기념관 재단장이 지지부진한 것은 바로 우리의 문화전통을 지키려는 의식의 부재에 다름아니라고 말한다.

250만 시민이 상화기념관 건립에 필요한 부족분 1억5천만원을 충당하려면 1인당 60원을 부담하면 된다. 1인당 60원. 1인당 60원만 내면 대구가 낳은 대표적인 민족 시인 상화기념관은 세울 수 있다.

최미화 기자 magohalmi@imaeil.com

세계 각 도시들의 향토가 낳은 문화·예술인들의 기념관을 건립하는 이유는 두가지이다. 기념관을 찾아 문화예술의 향기를 남긴 유명인사들의 흔적을 만나면서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고,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부심을 키워간다. 덧붙여서 각 지역들은 굴뚝산업과는 예술인 기념 이벤트를 통해서 부를 창출하기도 한다.

문화예술인들이 묻혀있는 무덤도 좋은 영감을 떠오르게 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정착 문화예술인들의 체취가 묻혀있는 생가보다는 권할만하지 않다.

파리에서 한시간 거리인 오벨리아쥬의 고흐 생가 '메종 드 고흐'. 고흐가 자살하기 전 3개월쯤 기거한 다락방 여인숙은 그모습 그대로 고흐기념관이 돼있다. 천장이 낮아서 제대로 서지도 못하던 관광객들은 구부리고 서야하며, 창문조차 없던 고흐기념관에서 천재화가 고흐의 고뇌와 슬픈 인생을 떠올린다. 작품을 세울만한 공간의 여유도 없어서 야외에서 작품을 그렸던 곳도 관광명소가 돼있으며, 오벨리아쥬 전체가 단 3개월을 머물다간 고흐 때문에 먹고 산다. 오벨리아쥬는 산업을 중요시하지 않으며, 하나도 뜯어고치거나 새롭게 하지 않는다. 문화예술인들이 살아숨쉬던 그 흔적 그대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은 크기가 1평반이다. 자신이 원폭 피해자이면서도 세상 평화를 추구했던 나가이 다카시('묵주알'의 저자)는 기념관은 다다미 한칸 크기에 불과하다.

전라도 유달산의 박화성기념관이나 영랑생가는 지역민이나 행정, 유족들이 합심해서 서로 부족한 것들을 보완해서 완성을 보았지만 대구는 그렇지 못하다. 상화기념관 건립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상화시인외에도 대구가 낳은 고월 이장희, 빙허 현진건, 음악가 박태준, 현제명, 미술가 이인성, 서예가 죽농 등 어느 누구의 기념관도 건립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교육도시로서의 대구, 이제부터 보듬어나가야할 때다.

최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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