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보성 차밭단지

"차밭에 왔으면 뭣하고 있어. 요렇게 찻잎을 따먹어 봐야제". 40대 아낙이 세가닥으로 솟아 오른 새순을 골라 따내 직접 먹는 시범을 보이며 연신 재촉한다. 마지못해 새순 하나를 골라 입에 넣어 본다. 첫 맛은 쌉쌀한 맛, 하지만 쓴맛 뒤에는 차향이 입안 가득 번진다. "우리는 이거 비싸서 못 사먹어. 고급차여…. 퇴비만 하제, 비료는 안 써…. 완전 무공해여". 이마에 번진 땀을 훔치며 그제야 눈인사한다. 노래 한곡을 청하자 "찻잎 딸 때는 이야기나 하지, 노래는 안 하는게 좋아. 안그러면 신명 때문에 엉덩이가 들썩거려 찻잎 따기는 영 글러뿌제라".

판소리 서편제 보성소리의 고향인데다 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 벌교를 끼고 있는 전남 보성군. 여기다 전국 최고 규모의 봇재 차밭단지까지 있는 보성은 복도 많은 고장이다. 최근엔 영화와 CF 촬영지로도 떠올라 더욱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마침 25일은 차(茶)의 날. 이럴 즈음 보성 차밭으로 초록빛 여행을 떠나봄도 괜찮을 듯. 찻잎의 초록빛으로 눈을 씻고 차 한 모금으로 입안을 헹군 뒤 목구멍으로 차를 삼키면 세상사에 찌든 몸이 차향 속에 새로 피어난다.

대구에서는 다소 먼 길이다. 그러나 보성군 봇재 차밭단지에 들어서려면 우선 눈부터 비벼두는게 좋다. 보성읍에서 율포방향 8㎞지점. 이때부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산허리를 뒤덮고 있는 초록빛 융단이 끝도 없이 굽이치며 요동하기 때문이다.

깎아지른 산비탈을 타고 앉은 차밭은 온통 초록 물결. 어찌보면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같기도 하다. 차나무가 S자 모양으로 빼곡하게 열을 짓고 있는 차밭은 드문드문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면 한 폭의 풍경화로 착각하게 한다. 차밭으로 올라서면 그림같은 풍광에 이미 넋을 놓은 방문객은 차향기에 또 한번 취하고 해풍이라도 불어올라치면 발길은 그대로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봇재고개 초입의 동양다원(061-852-2255). 주인의 꼼꼼함이 엿보이는 다기 전시장 겸용 시음장. "햇차부터 한 잔 하라"는 다원주인의 권유는 들리지 않고 발걸음은 차밭으로 향한다. 쭉쭉 뻗어 오른 삼나무 사이 오솔길이 500m쯤 이어지다 끝나는 지점. 초록빛 물감을 뿌려 놓은 차밭 2만5천평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그 차나무가 일제히 뿜어내는 향기. 여기서 햇차 한잔을 곁들인다면 눈의 티끌도 씻어내고 마음의 때마저 죄다 녹아내릴 듯 하다. 이 순간 만큼은 녹차밭을 구르듯 온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진다.

차밭 곳곳엔 방문객들이 사진찍기에 바쁘다. 광주에서 왔다는 정명순(29.회사원)씨는 "TV로만 보다 직접 와보니 정말 이런 곳이 있었나 싶다"며 "다음엔 좋은 사람과 같이 와야겠다"며 까르르 웃는다.

금방 따낸 햇차를 제품으로 만드는 공장. 검게 그을린 초로의 공장장 손종현(65)씨가 분쇄기 소음속에 알아듣기 힘든 전라도 사투리로 제조 공정을 설명한다. "차는 덖고 비비고 식히는 과정 등을 거치는데 좋은 차는 찻잎을 따낸 후 9번 이상 정성을 들여야 나온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최근 영화 '선물'과 TV 연속극 촬영지, 차밭(수녀편) CF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대한다업(061-852-2593). 봇재에선 가장 큰 30여만평 규모이다. 차는 채취시기에 따라 우전.세작.중작.대작 등으로 나뉜다고. 그중 곡우 전에 딴 찻잎으로 만든 우전차가 최고급인데 가격은 100g에 4만∼5만원선. 잎은 8월까지 따내는데 중작과 대작은 기계로 따기도 한다는 다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봇재지역 다원은 대부분 가공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차의 품질이 비슷하다 해도 값은 다원별로 차이가 난다. 어느 다원을 방문해도 인심 좋은 얼굴로 반겨준다.

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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