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상화 취재를 하면서 크게 깨친 것 가운데 하나는 한 시대를 이끈 큰 인물은 결코 우연히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엄정한 가풍, 주변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헌신, 본인의 뛰어난 자질과 인류애를 향한 끊임없는 투쟁 등 모든 요소들이 배합될 때 걸출한 인물은 태어난다. 아니 만들어진다.
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라잃은 민족으로서 결코 놓아서는 안될 유일한 희망의 싹인 '저항정신'을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 간직하고 실천했던 상화시인을 우리곁에 두기까지 여러 사람들이 영향을 미쳤지만 특히 상화를 둘러싼 여성들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상화를 둘러싼 여성은 크게 세갈래. 첫째는 어머니 김신자 여사, 둘째는 아내 서온순 여사, 그리고 마지막은 상화와 정을 주고받았던 연인들.
상화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상화시인이 8세 되던해에 아버지 우남 이시우(又南 李時雨)는 타계하고, 상화를 비롯한 4형제는 어머니 손에 남겨졌다. 상화의 출생신고도 백부 소남공 이일우(小南 李一雨) 앞으로 된데서 알 수 있듯이, 남편 우남공을 먼저 떠나보낸 상화 모친 김여사는 자연 시숙(소남공)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소남공은 상화의 가계가 대구의 명문가로 발돋움하는 기초를 마련한 아버지 금남 이동진(錦南 李東珍, 상화의 친할아버지)의 정신을 그대로 빼닮았다. 금남 이동진은 홀어머니 밑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한문을 터득하고, 가난한 삶을 근면으로 극복하여 결국 삼천석의 살림을 일궈냈다. 갑자기 돈을 번 사람들이 빠지기쉬운 천민자본주의 콤플렉스를 극복한 금남공의 아들 소남공은 궁핍했던 시절에 가혹했던 대지주들과는 달리 아주 낮은 소작료를 받으면서 지역사회에 베푸는 일을 시작했다.
현 대륜학교의 전신이 된 우현서루를 세워서 경향 각지의 서생이나 선비들이 침식을 제공받으면서 학문에 대해서 연구하고 담론을 나눌 수 있도록 배려했다. 땀흘려 번 돈으로 아무런 댓가없이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내놓는 '경상도 기질' 즉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취하는 진정한 대구정신이 우현서루의 건립이며, 부자 양대에 걸친 대구정신과 역시 인간의 근본만들기와 직결되는 교육에 대한 끝없는 애정을 지닌 상화모친이 있었기에 상화는 탄생할 수 있었다.
신장이 5척6촌(169·696cm), 체중이 7~8관에 이른 여걸 상화의 모친은 교육을 통해서 여성개화를 열망하던 시숙이 창건한 달서여학교의 지역 부인들을 적극적으로 입회시켰고, 달서여학교의 운영 유지를 위한 의연금 모금에도 앞장섰다. 청상의 고절을 노후까지 그대로 지키며, 인자하고 후덕한 성정을 지닌 모친 김신자 여사는 교육으로 민족을 일깨우려는 상화 백부의 정신을 그대로 수용했고, 어린 상화를 위대한 재목으로 성장시켜나간다. 모친과 백부가 집안의 안일 대신 지역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상화의 민족의식은 뜨겁게 자라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교남학교의 무보수 교사 자청으로 이어졌다.
민족을 껴안고 고뇌하는 지식인 상화에게 또다른 의미에서 지울 수 없는 여인은 아내 서온순씨. 상화가 마지막 길을 맡겼던 아내 서씨는 재덕을 겸비한 충청도 공주색시. 부족함없는 방년 18세의 아내였지만 상화는 혼례를 치루자마자 부인을 냉대했다. 당시 신학문을 하는 모든 젊은이들의 경향이기도 했지만 상화도 한여인을 알고 있었다. 손필연(孫畢蓮). 지난날 상화는 목우 백기만이 "너 그 여자(손필연)랑 연애하지"라고 지나치게 솔직하게 묻자 "아니야, 독립운동을 하는 여자인데 그의 동지들이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있어서 뒷바라지를 하는 거야"라고 대답했던 적이 있다. 어떻든 손필연은 칼날 바람이 부는날 상화랑 영화구경을 가면서 자신의 명주 목도리를 풀어서 상화의 목에 감아줄 정도였다.
어떻든 상화의 아내 서씨는 혼례를 치루자마자 독수공방 생활에 접어들었으나 불평 한마디 없이 시집살이를 감내한 인고의 여성이었다. 43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던 상화가 저승길에 가면서 계산동 2가 84번지 고택 안방에서 아내 서씨에게 알아들을 수 없게 들려주었던 몇마디는 "여보, 그동안 참 미안하오"가 아니었을까. 프랑스 유학을 꿈꾸며 동경의 아테네 프랑스에서 수학하던 상화는 유학생들이 모이는 신전구 유학생 회관에서 운명처럼 또다른 한 여성을 만났다. 유보화(柳寶華). 함흥 출신으로 모든 동경 유학생들의 사랑의 표적이던 그녀와 상화가 어떻게 접근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깊은 사랑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마돈나, 언젠들 안갈수 있으랴'-이상화 전집·평전, 정진규 편저, 문학세계사 펴냄, 271쪽 재구성) 물론 상화의 대표작 '나의 침실로'나 '이별을 하느니'가 모두 유보화를 대상으로 하여 쓰인 작품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유보화가 당시 상화의 시에 불꽃을 당겼던 하나의 영매였음에는 분명하다.
김팔봉이 쓴 글에 따르면 "상화는 그때 가회동 막바지 취운정 안에서 그의 연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중략). 그의 연인은 함흥 여성이었다. 그리고 폐가 나빴다".아무튼 상화의 유보화에 대한 사랑은 꽤 지속됐는데, 유보화가 1926년 가을 폐병으로 상화의 품에 안겨 숨짐으로서 막을 내렸다. 피를 토하는 보화를 한달 이상 간호한 보람도 없이 보화는 그렇게 떠났다. 어떻든 유보화는 상화에게 있어서 탐미시를 낳게한 생명력의 상징이다. 이외에도 타계한 상화의 시비를 세울때 소복단장으로 먼 발치에서 바라봤던 송옥경(宋玉卿)은 상화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지닌 여성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예기 김백희와도 관계가 있었다.
상화를 둘러싼 여인들에 대해서 뭇얘기들이 오가자 백부 소남공은 그의 출중함을 익히 아는지라 "고놈, 매삽고 차운 놈"이라며 일갈하며 가타부타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백부는 상화가 무엇때문에 그러한 관능속에 빠져들었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최미화기자 magohalm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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