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회계' 제도가 올해 처음 도입된 뒤 각 학교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 이는 총액만 배정해 준 뒤 예산 편성.집행.결산 등 모든 과정을 학교 스스로 하도록 한 것. 교장으로서는 수억원씩의 예산을 각 학교 현실에 맞춰 짜고 사용할 수 있는 재량권을 갖게 된 셈. 전에는 교육청이 대부분의 집행항목을 세세하게 지정, 학교들은 그것에 맞춰서만 돈을 사용해 왔었다.
그러나 자율이 주어지자 오히려 부담으로 받아 들이는 학교도 많다. 게다가 학교별로 65% 정도씩 내려주던 표준교육비를 100%로 증액해 줌으로써 학교마다 3천만~1억여원씩 더 받게 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하는 역할도 맡았다. 교장이 단순한 학교 관리자가 아니라 경영자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나=예산의 덩치부터 달라졌다. 종전에는 교장이 용도를 결정할 수 있는 몫이 미미했다. 하지만 이제는 인건비 등 고정 경비 외의 학교운영 지원비, 특기.적성 교육비, 급식비 등 모든 수입이 단일 회계로 잡힌다. 각종 예금의 이자, 쓰지 않는 물품을 처분해 얻는 수입금, 학교 시설을 빌려주고 받는 사용료 등도 학교가 관리하게 된 수입이다.
쓰기는 더 어렵다. 학교 특성, 지역 사정 등에 맞게 예산을 편성해야 하고, 교내 모든 분야에 골고루 지원되도록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시교육청 담당자는 "예전에는 예산이 모자라면 교육청에 사정하거나 학부모 찬조금으로 해결하는 게 관행이었다"면서, "학부모에게 손을 벌리지 않도록 하자는 게 학교 회계의 또다른 취지"라고 했다.
교사들의 역할도 중요해졌다. 주는 예산 받아서 교과를 운영하고, 모자라면 불평이나 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교장에게 필요 예산을 요구하고 받아서 제대로 써야 한다. 학부모도 학교운영위를 통해 예산을 심의함으로써 학교 운영에 관여할 수 있는 폭이 커졌다.
◇어떻게 돼 가나=학교 예산 편성 과정에 참여했던 도원중 이정원 교사는 "여전히 관행을 벗어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학교가 대다수"라면서, "예산을 다 짠 뒤에야 돈이 남은 걸 알 정도로 회계 개념이 약하다"고 했다.
또다른 교사는 "도서실 확충, 학생활동 지원, 교사연수 강화 등 교실 지원에는 인색하면서 각종 공사를 벌이고 물품 구매를 늘리는 데는 유난히 적극적인 교장이 많다"고 의문스러워 했다.
학교 회계 도입 이후 일부 학교에서는 특이한 일들이 생기고 있다. 수성구 몇 학교는 최근 교훈을 새긴 대형 석물을 들였다. 교문을 들어서면 금방 눈에 띌 정도로 큰 규모. 한 교장은 "학생들이 교훈에 너무 무관심한 것 같아 설치했다"면서, 작은 조형물 2개를 곁들여 500여만원을 지출했다고 했다.
몇 학교는 최근 전자파 차단 조끼를 대량 구입했다. 한 학교의 경우 개당 5만원짜리 교사용 25벌, 학생용 45벌을 샀다. 적잖은 돈이지만 교장은 "요즘 학생과 학부모들이 건강 걱정을 많이 해서…" 사기로 한 것이라고 했다.
또다른 학교는 학급 문고용으로 개당 15만원짜리 책장을 30개나 샀다. 한 학부모는 "가격이야 제품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가정에서도 5만원 안팎 짜리 책장을 사는 것에 비하면 심한 것 아니냐?"고 했다.
한 중학교 교사는 학교의 잘못된 물품구매 관행을 지적했다. 조금만 알아보면 훨씬 싸게 살 수 있는데도 기존 거래처에 소매가를 다 주고 구입하는 것은 낭비라는 얘기였다. 과학상자의 경우, 일부 학교가 지불하는 소매가는 8만원이 넘지만 서문시장에 나가 보면 똑같은 제품을 25% 할인해 준다는 것. "업체에서 홍보하러 오기까지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고정된 거래처에서만 비싸게 사는 것은 그대로"라고 그는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국.공립학교 예산은 학교운영위 심의를 반드시 거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아직 심의하는 수준이 낮고 교장의 의지가 강해 실효는 크지 않다. 교사들은 "심의과정에서 교사.학부모와 교장이 얼굴을 붉혀가며 뜯어 고치는 학교도 있기는 했지만, 대다수 학교에서는 원안대로 통과됐다"고 했다. 그들은 학부모와 교사들이 학교 운영의 주체이자 동반자로서, 보다 적극적인 심의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청이 "첫 해라 혼란은 불가피하나 점차 바로잡힐 것"이라는 희망적 전망만 내 놓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한 해 시행해 본 뒤 모범 사례와 잘못된 사례를 알려주고 바로잡아 가는 식으로 해서는 올 한 해 학교 운영이 방치될 것이라는 주장교사들은 또 "교장의 의식 변화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했다. 혼자서 학교를 운영하고 책임진다는 태도를 떨치고 학교 구성원 모두와 함께 의논하고, 만들어가겠다는 의식의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김수용기자 ks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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