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지상의 모든 길들은 초행길입니다내 순결한 혈흔이 찍히기 전까지는

세상은 바지랑대 길이만큼의 길만 내게 보여주셨으므로

감히 허공의 길 넘보게 되었을까요

벼랑 끝, 발을 헛디뎠을 때의 아찔함

순간의 어떤 섬광 하나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난 주저하지 않고

허공인 몸의 길 따라 줄기를 뻗었답니다

사지를 친친 감으며 더듬어갈 때

몸속 깊은 곳에서 어둠의 수액이 퐁퐁 솟아나오고

흰빛, 자줏빛, 붉은빛

비명처럼 터져나오는 내 안의 묵음(默音)들

-강해림 '나팔꽃'

아름다운 서정시 한 편을 읽는다. '지상의 모든 길들은 초행길'이라는 구절이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은 사실 모든 게 초행이다. 그래서 시행착오도 생기고, 회오도 생기고, 그런만큼 아름답다.

세상이 준 바지랑대 길이만큼의 길에서만 멈추고 만다면 나팔꽃은 얼마나 멋없는 꽃이 되고 말것인가. 니체가 말했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추구하다 파멸한 인간을 가장 사랑한다고. 이 시에서 나팔꽃은 그런 뜨거운 인간처럼 보인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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