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깊은밤 가장 순한 별빛을 따라 한 사내 떠난다공원 외진 자리 인조나무 벤치에 앉아

며칠 째 몸을 말리던 축축한 중년의 사내

오래도록 적시어 온 심장을 마지막으로 말리더니

숲의 가장 굵은 나무 둥치 곁으로 찾아 들어

길 떠난다

꽉 조여오던 갑충의 나날들

날개를 달고 날아오른 왕매미의 껍질처럼

마을쪽으로 뻗은 나뭇가지에 고스란히 걸어 놓는다

아침이 되면

살아 숨쉬는 것들로 다시 분주해져야 하겠지만

이 순간, 수천 년을 다져온 지층을 뚫고 뻗어 나간

떡갈나무의 뿌리보다 더 질긴 인간의 길을 벗어나

사람형상의 껍데기를 벗어나는 순한 생명 하나 때문에,

떡갈나무 숲은 숨을 멈추고 있다

-김은령 '떡갈나무숲 이야기'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수사에 가려 있지만 이 시는 죽음에 대한 레퀴엠이다. 죽음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조건이다. 죽음이 있어 삶이 존재하는 것인지 모른다. 죽음에 대한 철학이 깊은 사회가 성숙한 사회이다.

천년 왕국 신라의 향가에는 죽음에 대한 깊은 영성이 있고, 조선시대 시가들에는 죽음 대신 현세에 대한 집착이 크다. 이것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에 기인한다. 결국 죽음은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산 자의 태도에 따라 그것이 아름다운 것, 혹은 두려운 것이 되기도 한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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