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사우나에 갔다. 빌딩하나가 온통 목욕과 관련된 시설이 있는 곳이다. 사우나와 찜질방과 옥외 풀장, 그런 게 다 있다. 지하에 있는 여성 사우나에 가서 열탕 언저리에 앉았는데 마주 앉은 부인과 아이가 눈길을 끌었다. 많아야 서른 안팎으로 보이는 부인은 아직 유아원에나 갈 나이로 보이는 딸을 데리고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 부인이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마더, 화더, 굿모닝, 이런 종류였다. 아이가 한마디 씩 따라하면 어머니의 얼굴엔 적이 만족스러운 빛이 어렸다. 보아라. 내 아이는 영어를 잘 한다. 나는 아이에게 영어 교육을 시키는 어머니다. 아마 그 어머니의 마음엔 이런 자부심이 차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내 눈엔 아이가 장난감처럼 다루고 있는 샤워기만 보였다. 물을 쉴새없이 흘려버리는 샤워기. 한참 눈총을 주었다. 그래도 못 알아차려 참지 못하고 말했다. 샤워기를 끄세요. 물이 아깝잖아요. 부인은 아니꼽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못해하며 물을 잠궜다. 어머니가 할 일은 영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물을 낭비하는 것이 어떻게 나쁜 일인지, 그리고 물이 자원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한 마디 보태려다 말았다.
요즘 가뭄은 보통이 아니다. 아침마다 북한산에 가는데 농촌이 아니더라도 가뭄의 심각한 현실이 보인다. 뿌리가 얕은 나무들은 잎이 축 늘어졌거나 오그라붙었고 아주 시들기도 했다. 꽃도 물기가 모자라 잎을 다 열지 못하고 시들시들했다. 깊은 골짜기의 샘구멍들은 마른 것도 많고 흙은 가루먼지가 되어서 밟으면 푸석푸석 날아오른다. 물이 없어 모가 타 죽고 고추며 감자 어느 밭작물 하나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물이 없으면 꽃도 피지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 눈이 멀고 마음이 닫힌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물은 돈이 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돈의 힘이 아주 큰 것 같지만 조금 마음을 열면 돈으로 해결 되지 않는 것이 더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세상은 사람 혼자서만은 살 수 없다. 다른 생물이 함께 있어야 살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래도록 사람 이외의 생물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지구에 있는 모든 것. 심지어 우주에 있는 것까지 사람의 이익에 종속시키려는 노력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했다. 이런 결과 지구에는 나무가 죽고 동물이 죽고 풀이 죽고 꽃이 죽고 강이 죽고 바다가 죽고… 사람만 남게 될지 모른다. 죽은 자연, 죽은 환경 속에서 사람만 살아남는다. 상상만 해도 무섭다. 이보다 더한 무지와 야만이 어디 있으랴. 풀과 나무와 흙과 강이 죽은 지구에서 홀로 살아남은 사람들. 돈이 있은들 무얼 할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게 될지 모른다. 먹을 물은 사람의 몸에만 남아 있을 테니까. 그러나 오염된 사람을 잡아먹은 사람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인간위주의 세계관은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게 했고 삶의 방식을 탐욕과 오만의 질서로 자리잡아놓았다. 우리가 거창하게 들리는 말로 신이니 세계관이니 하지 않아도 잠시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면 다 알게 된다.
사랑이라는 것은 나와 타인, 사람과 자연 같은 서로 다른 관계 사이의 균형을 잡게 하는 에너지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모든 것 중에 사랑을 으뜸으로 삼는 것도 '균형'의 중요성 때문이다. 균형을 이루면 어떤 병리현상도 잘 생기지 않는다. 올해. 기상 관측 이래 최대의 가뭄 피해가 우려된다는 이때 물을 함부로 쓰는 일이 내 생명 자체를 탕진하고 학대하는 일이라는 걸 깊이 생각하자. 물이 메마른 논과 밭. 그것이 농부의 고통과 가난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우리의 생명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연이 사람을 해치고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지옥의 때가 오기 전에. 이경자(소설가)
댓글 많은 뉴스
尹 탄핵심판 선고 앞 폭동 예고글 확산…이재명 "반드시 대가 치를 것"
노태악 선관위원장 "자녀 특혜 채용 통렬히 반성" 대국민 사과
[단독] '애국가 부른게 죄?' 이철우 지사,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돼
[시대의 창-김노주] 소크라테스의 변론
선관위 사무총장 "채용 비리와 부정 선거는 연관 없어…부실 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