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경주에 갈 때마다/ 저승이 이승을 이기는 곳이 있고/ 하얀 모랫내 건너/ 노란 들녘 지나/ 파란 솔등 돌고/ 코스모스 헤치며 서울로 돌아 왔다"
쉰 살 이전에는 서울에 일이 많아오지 못했고 육십 줄에 들어서면서 일년에 한 두 번쯤 이렇게 고향 경주에 들렀다 갔던 것이다. 경주가 낳은 한국 현대사의 큰 산맥인 김동리 선생의 생가가 서천 가까이 성건동에 있다는 것만 알지, 자세히 몰라 경주 서영수 시인의 안내로 동리의 생가를 찾아보았다.
아래채가 있는 자리는 밭으로 변했고, 위채는 초가였는데 지붕만 왜기와로 바꾼 상태였다. 아래채와 위채가 한 집이었는데 가운데로 길이 나서 갈려 있지만 아직 시골 맛이 남아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서쪽으로 김유신 묘가 있는 수도산(水道山)이 보였고, 잠깐 걸어 서천가에 이르니 북쪽 멀리 옥녀봉과 '무녀도'의 무대인 '예기소'가 보였다. 마을 서북쪽 일대는 황무지와 늪지였고 허허벌판이었다. 마을 옆 철교 밑에는 문둥이, 거지, 각설이 패들이 살았다고 한다. 생가의 서남쪽 서천가에는 당나무가 줄지었고 무당과 점쟁이들이 살았다고 한다.
동리는 이런 환경에서 자랐었다. 지금은 당나무 한 그루만 남았고 문둥이, 거지들이 모여 살았던 다리는 교각만 폐허처럼 남았다. 그가 서천의 이런 음울한 분위기에서 유년을 보냈기에 탐미적인 눈으로 '무녀도' '을화' '황토기' '바위' 등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귀향후 삼 사년 어물전 하던 중형(仲兄) 집에 머물러 있었다. 가세가 기울어 학비조달이 안되므로 귀향했다고 하지만 동리의 귀향은 단순한 귀향이 아닐 것이다.
고도 경주의 마력에 이끌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동리는 배거번드적 기질이 있었다.
'역마'의 주인공 '성기'에서 보듯 엿장수가 된 성기는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길을 떠나는 장면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이모였다는 숙명을 받아들이면서 어머니가 있는 고향을 떠나는 마당에 육자배기 가락의 흥겨움이 어떻게 가능할까. 사회통념으로는 방랑자의 삶은 고달프고 불행한 것이다. 그러나 동리문학에서는 운명이 그러하다면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도 행복일 것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운명이 있고 그 운명에 따라 살아갈 때 독자적인 행복을 얻는다는 것이 '제3휴머니즘론'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사회주의를 부정하고 토속적인 것에서 우리 민족의 심성과 운명을 읽어 내면서 운명에 맞게 사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김동리 선생이 해방직후에 강력하게 좌익에 반대할 수 있었던 사상적 무기였던 셈이다. 이것이 사회나 역사에 대한 작가의식이다.
폴 발레리가 죽자 프랑스 국민이 그를 예우한 국장은 성대했다. 유해는 고향인 지중해 작은 항구도시 세트로 옮겨져 바닷가의 '해변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 묘지는 어떤 역사적 유적에 못지않은 명소가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하루 3천명이 넘는 방문객이 몰려온다고 한다. 서성거려 봤자 낡은 묘석밖에 없는 음울한 묘역을 세계인의 공원으로 만드는 것이 대시인이다. 프랑스의 브장송에 유학왔던 한국의 한 불문학도는 500㎞가 넘는 길을 자전거로 달려 이 '해변의 묘지'를 찾아와서는 발레리의 무덤 앞에서 혼자 맥주 15병을 비우고 통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시가 메시지라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는 커다란 부름이다. 소설이 또한 메시지라면 김동리의 '을화'는 커다란 부름이 될 수 있다. 문학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서구인의 라이센스(Licence)를 부러워하면서 문학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에겐 너무 없는 것 같다. 김동리 선생의 '을화'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올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 그의 눈에 비친 고도(古都)는 폐허였고, 끝없는 슬픔이고, 우울이고, 주검이었다. 이 슬픔과 우울과 주검의 리듬이 그의 전생과 연결되어 어려서부터 슬픔과 우울과 주검의 폐허 속에 젖어 탐미적인 눈으로 가장 한국적인 무속의 음울한 분위기를 장편 '을화'를 통해서 만들어냈기에 하는 말이다. 김동리 선생의 생가 터를 구입하여 우리 시대의 문호의 기념관을 세운다면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문학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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