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월드컵 자원봉사 안재호 할아버지

◈머리는 희끗 희끗해도 영어 통역엔 자신있다

60억명이 산다는 지구촌, 그중에서도 4천300만명의 한국 땅, 남녀노소가 어울려 사는 곳이다. 그러나 국제 행사 때가 되면 노인들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세상은 온통 젊은이들로 붐빈다. 올림픽이 그랬고, 얼마 전에 끝난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회도 그랬다. 다가올 '2002 월드컵'. 대회에도 노인들은 거치적거리는 일이 없도록 방안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야 할는지 모른다.

안재호(70) 할아버지, 이 못마땅한 젊은이들만의 잔치에 한몫 거들겠다고 나선 사람이다. '2002 월드컵'. 영어 통역봉사 안내원이 된 것. 지난해 여름 대구시 수성구청이 모집한 '2002 월드컵' 영어 통역봉사 안내원. 시험에 10대 1 가까운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영어라면 웬만큼 자신있다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치른 시험이었다. 지난 연말엔 한국관광공사 명예 통역 안내원으로도 위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현재는 월드컵 조직위원회 소속 통역원으로 활동중이다.

지금 안 할아버지는 내년 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대구시 수성구 청소년 수련원에서 미국인 강사들과 공부중이다. 일주일에 3일, 매일 2시간씩 외국인 강사들과 만난다. 지난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회에서도 안내원으로 활약했다."늙었다고 집에만 있으면 안되지요. 젊은 시절엔 나를 위해 충분히 일했고 이제 퇴임했으니 누군가를 위해 봉사할 때가 됐습니다". 안 할아버지는 지난 94년 공무원으로 정년 은퇴했다. 퇴임 후 공무원시절에는 별 쓸모가 없었던 학창시절 전공(구 청구대학 영어영문학과)을 살리기로 마음먹었던 것.

안 할아버지는 영어권 외국인과의 대화에 별 불편함이 없다. 70세의 지긋한 나이에 웬만한 젊은 영어 전공자들보다 나은 실력을 갖춘 데는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 지난 83년 1월부터 신문에 나오는 일일 생활영어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스크랩하고 외웠던 것. 그 전에는 혼자 이것저것 책을 사서 보았다.

요즘은 영어를 못하면 진급하기도 어려운 세상이지만 당시는 달랐다. 드러내놓고 좥혀 꼬부린 소리.를 중얼거렸다가는 손가락질 받기 일쑤였던 시절이었다고 할아버지는 추억한다.

"남들 모르게 스크랩하고 외우곤 했어요. 친구들은 지금 제 영어를 듣고 많이 놀랍니다. 언제 공부했느냐는 식이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안 할아버지의 공부는 변함이 없다. 청소년 수련원에서는 외국인과 영어회화, 집에서는 CNN, EBS, 영어책 읽기…. 혼자 새벽 1,2시까지 사전을 뒤적이는 일도 허다하다. 그는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영어 사전의 깨알같은 글씨를 찾는 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 눈이 건강하다.

안 할아버지는 영어뿐만 아니라 붓글씨 솜씨도 일품이다. 취미삼아 시작했던 그의 붓글씨는 이제 분가한 자녀들 집에도, 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제 나라로 돌아간 외국인의 집에도 액자가 되어 걸려 있다. 내년 월드컵 대회, 백발의 통역 안내원이 써 준 붓글씨를 받아든 벽안의 외국인들은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어느 축구대회나 마찬가지로 N세대, X세대, 그리고 붉은 악마들의 잔치로 끝날지도 모를 2002 월드컵. 그러나 내년에 대구의 월드컵 경기장을 찾는 사람들은 '백발 통역 안내원'.의 멋있는 영어를 듣게 될 것이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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