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루과이 라운드 10년 우리농업 어디로 가고 있나-(5)지지부진 농촌기반확충

의성군 단밀·구천면의 12개 마을 2천여 가구 농민들은 지난 가뭄 때 정부를 유난히도 원망했다. 예정대로라면 올해는 낙동 강물로 모내기를 마쳤을 터이지만, 1997년 12월에 착공했던 구천지구 농업용수 개발사업이 지지부진하기 때문이다.

227억원을 들인다는 공사 진도는 아직도 30%대의 머물러 있고, 20억원 넘게 들인 양수시설은 놀고 있었다. 본래 올해 말 완공 목표였으나 작년까지 들인 돈은 고작 67억원. 올해도 18억원이 추가 배정됐을 뿐이다.

"제때 공사가 끝났으면 이번에 잘 활용했을 것 아닙니까? 필요할 때 못 써 먹는 것을 뭣하려고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안계들에서 만난 박승열(54·단밀면 위중리)씨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위탁 받은 것까지 포함해 30ha의 논 농사를 지으면서 육묘공장도 운영한다는 박씨는 가뭄 탓에 모내기를 제때 못해 1천800상자의 모를 버렸다고 했다. 이래저래 생돈 1천만원쯤 날라갔다는 것.

◈필요할때 못쓰는 것 왜 만드나

옆에서 그를 진정시키던 권영창 단밀면장도 끝내는 "앞으로 또 몇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논 1만평과 소 50마리, 하우스 1천평 등 대작을 한다는 농민회 단밀면 조용우(44) 지회장도 "정부가 진정 농민을 위하다면 이렇게 해서 안된다"고 공감했다.

농업기반공사 의성지부 안우기 사업과장은 "예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이뤄진 공사는 낙동강 물을 퍼 올릴 생송(1단계)·생물(2단계) 양수장 뿐. 양수장과 논을 연결하는 용수로는 33.8km 중 2.8km밖에 만들지 못했다. 답답해진 농민들은 지난 12일 양수장 벽에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노벨상과 월드컵도 좋지만 우리에겐 당장 물이 좋다".

영주시 평은면 오운저수지 공사장 아랫 마을 주민들도 같은 일을 겪고 있었다. 벌써 5년째 계속 중인 저수지 공사가 아직도 언제 끝날지 오리무중인 것. 공사래야 큰 것도 아니었다. 총공사비가 겨우 27억원. 이것을 매년 3억, 4억원씩 쪼개 줘 올해까지 온 것을 다 합해야 18억원에 불과했다. 나머지 9억원이 오는 데 또 몇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공사 끝나기만 고대하던 60가구 43ha의 논밭은 올해도 관정이나 도랑물을 바라보고 지내는 중이다.

가뭄이 한창이던 지난 15일 기자가 찾아 갔을 때, 저수지 바로 밑 10마지기의 천수답에서 먼지를 뿌옇게 날리며 재벌갈이 하던 강선길(63)씨는 "3마지기에만 모를 겨우 냈다"며, "코 앞의 저수지 공사가 언제 끝날 지 원망스럽다"고 했다. 새참으로 쑥떡을 가져 왔다는 형수 정분귀(65) 할머니는 "이곳에서는 물이 안나온다며 관정도 안 파 줄려 한다"고 했다.

◈시·군청 관리시설엔 지원도 없어

국가는 UR대책으로 102조원을 농업에 투입하면서 기반 확충에 가장 큰 역점을 뒀다. 1차 42조원 사업 때는 9조4천여억원을 이 일에 투자했다. 2차 때도 적잖은 돈을 이 분야에 투입할 예정. 적잖은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점들도 많이 불거져 원성을 사고 있다. 예산을 찔끔찔끔 나눠 배정함으로써 크잖은 사업 조차 몇년을 질질 끌거나, 부실 공사, 관리 소홀 등 문제를 낳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이미 만들어져 있는 수리시설 관리 정책마저 불만을 사고 있다. 농기공 소유의 것에는 국고가 지원되는 반면, 사정이 더 어려운 소규모 것은 농민이나 시청·군청에 관리를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는 이런 수리시설에도 일부 국비가 지원되더니 올해는 더 감감 무소식이 돼 버렸다.

영주시청 김선옥 농지담당은 "역내 수리시설 379개 중 302개가 농민(수리계) 및 시청 관리 몫"이라며, "그러다 보니 관리가 제대로 안돼 못쓰게 된 시설들이 적잖다"고 했다. 경북 도내에는 저수지·양배수장·보·관정 등 수리시설이 총 1만4천924개 있으나, 농기공 몫은 2천190개이고 나머지 1만2천734개는 시청·군청 몫이다. 경북도청 이승재 농업기반 과장은 "생산 기반 확충 사업이 많은 성과도 거뒀지만 이제는 그런 수리시설의 관리 부담이 문제가 됐다"고 했다.

그 외에도 문제는 하나 둘이 아니다. 흙으로 만든 용배수로가 아직도 많은 것도 물 낭비의 큰 문제로 부상돼 있다. 농기공 경북지사의 용수로 6천622km 중 54%, 배수로 1천917km 중 76%가 흙으로 돼 있다.

◈경지정리 졸속 농민들 분노

경지정리의 졸속 공사 역시 오래 전부터 도마에 올라 있다. 경주 안강·노당·안계 들의 경지 재정리 공사는 완공 시한인 지난 5월을 넘기고도 완공이 안돼 모내기를 제때 못한 농민들이 애를 태웠다.

논 고르기 작업이 부실하게 끝나 엉망이 된 경우, 뻘구덩이 방치로 인해 사람과 농기계가 논바닥에 빠져 레카차와 굴착기로 끌어낸 일 등은 여러 곳에서 겪었다. 용수로와 논의 높이가 너무 차가 커 기계가 제대로 진입 못하거나 고장 나는 사례도 잇따랐다. 이때문에 농민들은 모내기만 끝나면 '한판 싸움'을 벌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노당·안계들에 1만5천여평의 농사를 짓는다는 경주 농정 심의위원 김재규(56·강동면 유금리)씨는 "660억원이나 들인 경지정리 공사가 엉터리로 돼 주민들이 분노에 차 있다"고 했다.

농업경영인 경북도연합회 장철수 회장은 "정부가 경제난 이후 곳곳에 엄청난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것과 달리 농업분야는 소홀히 해 농민들 사이에 불만이 높다"며, "농업정책의 일관성 상실 등으로 UR 정책들이 제대로 성과를 못 거두는 것 같다"고 했다.

정인열기자 oxen@imaeil.com

이희대기자 hdlee@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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