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병상기록 없다"…국가유공 민원 퇴짜

최무기(74·대구시 남구 봉덕3동)씨는 날만 궂으면 온 몸을 파고드는 고통에 한바탕 난리를 친다. 6·25전쟁 발발 그 해 육군 제8사단 10연대 소속으로 강원도 춘천에서 인민군과 전투 중 입은 상처때문이다. 50년이 넘게 몸 속을 떠도는 10여개의 수류탄 파편도 큰 아픔이지만 정작 그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 희생했는데도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공훈을 인정않는 현실이다.

최씨는 수원 야전병원을 거쳐 고향 경주의 육군병원으로 이송돼 귀향증을 받아들었지만 평생 다리를 절어야 하는 고통을 떠안았다.

최씨는 생존 자체를 감사해 오다 지난 96년 주위의 권유로 망설임 끝에 육군본부에 국가유공자 인정 민원을 냈다. 그러나 군은 입원 기록 등 입증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최씨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국가유공자로 등록한다 하더라도 얼마나 혜택을 받겠느냐"며 "병상일지가 남아있지 않은 게 내 잘못도 아니고 당시 상황을 증명해줄 동료들도 세상을 떠났거나 찾을 수 없어 막막하기만 하다"며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6·25 참전 전상자 경주의 박경호(75·감포읍 오류리)씨. 박씨는 1950년 7월 수도사단 1연대 3대대 1중대에 배속돼 안동 길안, 영천 신녕 등 전투에 참가한 뒤 9월1일 안강·기계 전투에서 오른쪽 가슴을 포탄 파편에 관통당해 3육군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문제는 그의 병상 기록이 없을 뿐 아니라, 군번조차 1보충대에서 1951년 2월19일에야 받을 수 있었다는 것. 박씨는 유공자 지정을 청와대 등에 탄원하고 행정심판도 청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관통상으로 추정된다"는 민간 병원의 진단도 소용 없었다. 육군 참모총장 이름으로 작년 8월18일 통보된 탄원 조사 결과도 입원 사실만 확인했을 뿐 그 원인은 기재하지 않았다고 박씨는 말했다.

그러나 같은 날 입대했었다는 김하중(76)씨는 "내가 먼저 총상을 입어 입원하고 있으니 박씨가 3육군병원으로 실려 와 만났었다"고 증언했고, 동생 경찬(71)씨는 "연락이 와 3육군병원 면회까지 갔었다"고 말했다.

6·25참전자들은 거의가 70대중반. 박씨는 성찮은 몸을 이끌고 5년전 중풍으로 쓰러진 부인(75)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지쳐 있다.

현재 대구지방보훈청에 등록한 6·25전쟁 상이군경은 3천499명. 이 가운데에는 그동안 경상이라는 이유로 아무 보상을 받지못하다 지난해 정부가 수용한 7급 상이등급 판정자 1천290명이 들어 있다.

하지만 최씨나 박씨처럼 전쟁 부상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 등록을 거절당하는 상이군경들이 많다.

이들은 "자료를 제대로 못갖춘 것은 국가의 책임인만큼 주위 증언 등을 증거로 인정하려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대구보훈청 이태봉 관리과장은 "지난해 등록 완화 이후 6·25 전상군경 등록신청이 한달 평균 40~50건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전쟁 당시 자대 의무대에서 치료받은 경우 대부분 기록이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99년 최씨나 박씨처럼 입증자료가 없던 김모(71·경북 문경시)씨가 안동보훈지청을 상대로 국가유공자 등록거부처분 취소청구 소송을 내 대구지법에서 승소판결을 받은 바 있다. 재판부는 당시 판결문에서 "입원기록과 병상일지 등 입증자료가 없고 병명확인이 어렵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여 처분하면 위법이다"고 밝혔다.

박준현기자 jhpark@imaeil.com, 이상헌기자 dava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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