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빨렝께 유적(2)-숨겨진 빠깔왕릉
세차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약해지면서 안개가 자욱하더니 이제는 비가 그치고 안개도 서서히 흩어져 주위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궁전의 정원 위에서 남쪽을 보니 거기에 다시 장엄하게 우뚝 서 있는 '명문(銘文)의 신전' 피라미드가 선명히 나타나 보였다. 그리고 궁전의 동쪽으로 약간 들어간 언덕에 비슷한 구조와 높이를 가진 세 개의 피라미드가 나무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로 '태양의 신전', '십자가의 신전', '잎사귀 십자가의 신전' 피라미드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세 개의 신전은 앞면에만 계단이 있는 단축 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데, 안팎으로 겹쳐진 유사아치형 방을 가지고 있다.
◈빠깔왕 시대 최고 전성기
기록에 의하면 빨렝께는 기원 후 3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9세기까지 번영하였는데 7세기까지는 소규모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서기 603년 12세의 나이에 어머니에게 왕위를 이어받은 빠깔왕과 그 아들인 찬발룸 Ⅱ세 왕대에 이르러 급속히 발전하였고, 현재 남아 있는 중요 유적이 대부분 이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 빠깔왕은 683년 사망하기까지 68년간 재위하며 궁전을 세우고 빨렝께의 번영을 이끌었다. 그는 인근의 다른 마야왕족과 혼인동맹을 맺거나 정복전쟁을 통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신라와 백제의 혼인동맹이나, 백제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라 왕실에 청혼하는 대가야의 경우와 매우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684년 48세에 즉위한 그의 아들 찬발룸 Ⅱ세는 '명문의 신전'을 세우고 그 내부에 화려한 아버지의 무덤을 만들었다. 빨렝께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피라미드인 이 명문의 신전은 건물 내부에 있는 세 개의 커다란 대리석 판에 마야문자가 빽빽히 새겨져 있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이 피라미드는 높이가 22m이고 매우 가파른 69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위험해서인지 입구를 막아 올라가지 못하게 하였다.
1949년 멕시코의 고고학자 알베르또 루스에 의해 발굴 조사된 이 신전의 지하에는 미로와 같은 구조로 이어지는 계단과 묘실이 있고, 그 비밀의 묘실 안에는 가로 2.1m, 세로 3m, 높이 1.1m의 큰 바위를 깎아 만든 석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화려한 비취옥으로 만든 가면에 덮여 있는 빠깔왕의 미라가 들어 있으며, 그 밖에 각종 화려한 유물이 가득히 채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멕시코시에 있는 국립인류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들이 빠깔왕 피라미드 건설
그러나 찬발룸 Ⅱ세 때 번영의 극에 달했던 빨렝께는 702년에 즉위한 그의 아들 깐 슐왕이 인근 세력에 포로가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갑자기 쇠퇴하고 말았다고 한다. 마치 신라에서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의 역할이 삼국통일의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처럼 역사에서 왕이나 지도자 개인의 능력이 한 나라 운명을 크게 좌우한다는 교훈을 여기서도 볼 수 있었다.
명문의 신전을 올라갈 수 없어 우리는 거기서 출토된 유물이라도 보기 위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박물관에 먼저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박물관은 가도가도 나오지 않았다. 무성한 밀림 속 미로와 같은 오솔길을 따라 30여분을 걸어갔지만 그래도 박물관은 나오지 않고 계속 가라는 화살표만 보였다. 주변 밀림 속 시냇가에는 작은 마야아치로 이루어진 마야유적이 숲속의 난쟁이 성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것들을 보면서 무심코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마치 마녀의 성을 연상케 하는 우중충하고 복잡한 구조의 건물 석벽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갑자기 길이 없어져 한참을 헤매었다.
특히 일행의 뒤에 처져서 호젓하게 따라오던 2명의 여성단원은 갑자기 사라진 길 앞에서 당황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길은 없고 주위는 어두운데 인적조차 보이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좀 떨어지기는 했지만 몇 분전에 분명히 앞에 사람들이 지나갔는데, 이상하고 야릇한 공포감이 온몸을 죄어왔다. 피어오르는 안개 속에서 조금 전 궁전 건물 안뜰에서 본 포로를 심문하는 부조그림이 떠올랐다. 왕에게 잡혀 온 포로가 발가벗기고 손톱이 뽑힌 채 제물로 바쳐지는 장면이 생각나는 순간 자신들이 제물로 바쳐지는 것 같은 공포가 온몸을 엄습하였다. 자기들을 버리고 앞서 간 야속한 동료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폭포 소리에 녹아들어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박물관 고전기 마야유적 즐비
천신만고 끝에 건물 벽을 따라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여 겨우 박물관에 도착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미로의 박물관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유적의 반대편 길옆으로 옮겨 새로 지은 것이었다. 유적을 다 보고 차를 타고 가면 5분이면 되는 거리를 그렇게 어렵게 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박물관은 특히 더 기억에 남게 되었다.
이 박물관에는 빨렝께 번영을 이끌었던 빠깔왕과 찬발룸 Ⅱ세왕의 치적을 중심으로 한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고전기 마야를 쉽게 이해 할 수 있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마야에는 왕과 왕족, 제사장과 귀족, 전사(군인). 기술자와 상공인, 기술 없는 일반농민의 5개 계급이 있었는데 왕은 각종 신에 대한 제사와 같은 의례를 주관하면서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다음으로 귀족은 왕의 명령을 집행하고 사제들은 왕이 주관하는 제사에서 제물을 바치고 제의를 수행하였다. 기술자와 상공인은 다른 지역과의 교역을 담당하고 일반농민들은 화전이나 계단식 경작지, 관개농업 혹은 저습지 경작을 통하여 옥수수를 비롯한 다양한 작물들을 생산하였다.
빨렝께는 인구가 집중된 센터의 하나이나 마야지역 전체를 통일하지는 못하였다. 각지의 마야센터는 하나의 공통된 문명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 경쟁관계에 있었고, 전쟁과 병합, 노획물과 조공 등 이익에 따라 연합과 분열로 점철되어 있었다. 한동안 통일된 국가를 이룩하지 못했던 우리 고대사의 가야(加耶)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사욕 채우려 국가자원 낭비
신과 다름없었던 왕은 신하와 경쟁자에게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매우 화려한 궁전을 지으려고 했고, 그것이 빨렝께의 '대궁전'으로 나타났던 것이며 조상들을 기리기 위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된 신전을 지었던 것이다. 왕권을 과시하기 위하여 웅장한 기념물을 세우고 거기에 왕을 찬양하는 마야문자를 가득히 기록하였다. 그러나 왕 개인을 위한 지나친 국가자원의 소모는 백성들을 지치게 하고, 가뭄에 따르는 흉작과 인구과잉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없었다. 따라서 빨렝께를 중심으로 한 고전기 마야문명은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고 아름다운 건축물들도 밀림 속의 신비로만 남게 된 것이다.
글: 김세기(경산대 교수) 사진: 최종만(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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