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화 가계의 교육사업(2)
나라의 흥망이 경각에 달려있던 구한말.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울한 시절에도 공익(公益)을 취하고 사욕(私慾)을 버리려는 '대구 정신'은 죽지 않고 살아 굼틀댔다. 세계부채시장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국채보상운동과 토종 애국자본에 의한 교육·계몽 사업에서 대구 정신은 빛을 발했다.
토종 자본에 의한 교육 사업의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상화 가계의 대(代)를 이은 교육 봉사. 상화 가계의 교육 헌신은 우현서루로 대표되지만 실상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됐다. 한 갈래는 1904년부터 1913년까지 10년간 전통적 사숙과 근대적 교육 기관의 가교 역할을 한 우현서루를 꼽는다면 다른 한 갈래는 여성이 제대로 배워야 나라가 튼튼해진다며 명신여학교와 달서여학교를 건립한 여성교육에 대한 투자를 꼽을 수 있다.
우현서루는 인재 양성만이 풍전등화같은 위기의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상화의 큰아버지 소남(小南) 이일우(李一雨)가 대구부 팔운정 101번지(현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일대 1천여평에 세웠던 지역의 민족적 의숙(義塾).
마치 경상감영의 선화당처럼 웅자하고 시원스레 서있던 우현서루는 본관, 동서고금의 서적 수천권이 구비돼있던 옛 서고, 팔도의 선비·준재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독서하고 공부하게 한 기숙시설까지 갖춘 민족적 의숙이었다. 이곳은 상해임정 대통령 박은식, 초대국무령 이동휘,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 고려대 창설자 인촌 김성수, 몽양 여운형 등 우국지사들이 글을 읽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꿈의 공간이었다. 이런 우현서루를 일경이 강제로 폐쇄시켜버리자 소남공은 조선국권회복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던 홍주일(洪宙日, 1876~1927)을 초빙하여 우현서루에 강의원(講義院)을 세웠다. 그러나 강의원마저 한·일야구시합 끝에 터진 패싸움에 연루된 것이 들통나면서 폐쇄당해 버렸다.
1921년 7월에 홍주일외 2명이 우현서루 본관을 가교사로 영남인재의 양성를 표방하며 세웠던 교남학원 마저 1924년에 신축 남산동 교사로 옮겨가버려 한동안 우현서루 본관이 비게 되자 소남공은 20년대말에 사설 남명학원을 설립했다. 남명학원은 훗날 광산업을 하던 김태원씨가 건물을 희사하면서 서구 비산동으로 옮겨가서 현재는 대성초등학교로 전통을 잇고 있다.
소남공은 남명학교(대성초등) 보다 훨씬 빠른 1905년에 또하나의 교육사업을 폈다. 이번에는 여학교였다. 우현서루 창설보다 한 해 뒤에 세워진 달서여학교는 국채보상운동의 기수 서상돈과 함께 설립했는데, 바깥 출입조차 금지되던 개화 초기에 '여성이 배워야 나라가 산다'는 여성교육론에 입각한 선구자적 정신으로 건립됐다.
달서여학교를 설립한 소남공은 조선총독부가 중추원참의 자리를 제의했지만 "왜놈의 녹은 먹지 않겠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집에 은거할 정도로 투철한 민족정신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살리는데 여성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 보수적인 지역사회에서 민족자본으로 달서여학교를 꾸려갔던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30일자에 따르면 달서여학교는 설립 1년만에 생도가 50명에 이를 정도로 커졌고, 소남공의 계수(이상화의 모친)이 리더하는 부인교육회에서 금액을 출연하여 교사를 넓히는 등 교육 여건을 개선시켜나갔다고 전하고 있다.
달서여학교는 상화 모친 김화수(본명 김신자, 1876~19047)의 도움으로 본격적인 여성 교육의 장으로 자리잡았다.
김화수는 (여성)교육이 부진함을 개탄, 이 지역 여자교육회를 발기하여 입회한 부인들로부터 200여원을 모아서 달서여학교에 기부했을 뿐만 아니라 낮시간에 글공부를 하기가 어려운 주부들을 위해서 달서여학교에 임시 부인야학을 세우기도 했다.
상화 모친의 열렬한 후원 아래 달서여학교는 1908년에 교사 낙성식을 갖기도 했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불교부인회 회장을 맡기도 했던 김화수는 "부인들이 유가적 습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라와 이웃을 생각하도록 눈을 넓히고 부녀의 실업과 충군대의를 따를 수 있는 덕목을 길러야한다"는 친목회 취지서를 남기기도 했다. 달서여학교는 조국광복의 염원을 가졌던 서주원 여사가 창설한 명신여학교와 통합됐다가 다시 김울산 할머니에 의해서 복명초등학교로 연결된다.
상화 모친의 교육에 대한 열의는 친며느리들보다는 시숙 소남공의 며느리 이명득(동양염직 창설자 이상악의 아내)에게서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상화 모친에게 시(媤) 종질부가 되는 이명득은 대구지역에서 거의 첫 유치원으로 알려지고 있는 싯달유치원(현 서문교회 자리)을 설립하여 유아교육에 이바지했고, 이 유치원을 판 돈으로 화성양로원을 운영할 정도로 일찍 사회사업에도 눈을 뜬 여걸. 남편과 사별한 중년의 나이에 여성운동에 눈을 떠서 당뇨로 눈이 멀어지기 직전까지 교육사업과 사회계몽활동을 지치지 않고 계속 편 이명득이 유아교육과 개화초기 여성운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시한번 정리될 필요가 있다.
최미화기자 magohalm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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