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섬을 찾아가는 것보다 더 설레는 여행이 있을까? 그 섬을 찾아 바다를 떠날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아득한 수평선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 그 섬이 희미한 얼굴을 드러내고 마침내 황홀한 마음으로 그 섬에 올라섰을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또 다시 사방으로 둘러 쳐진 수평선 뿐이다.
어쩌면 꿈과 그리움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어린시절을 동해안에서 보낸 나에게 망망한 저 수평선 너머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은 늘 신비로운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그러기에 대학 1학년 방학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 울릉도를 찾아간 것은 그 꿈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 만큼이나 설레는 여행이었다.
울릉도에 도착한 그 이튿날 아침 나는 작은 목선을 타고 새벽 안개 속에서 댓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나는 가파른 오솔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그 정상에 섰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 그 아래로 이름 모를 흰 들꽃 군락이 작은 분지 가장 자리에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쪽빛하늘 아래 청록빛 바다, 그 아래에 흰들 꽃으로 수놓은 눈부신 천상의 신비를 노래하는 은빛 갈매기 떼가 노닐고 있었다.
댓섬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본 가장 아름다운 지상의 풍경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20대의 내 예민한 감성의 바다에 떠돌던 막연한 '외로움과 그리움'이 눈에 보이는 실체로 변모 되는 사건이었다.
하늘 아래 이처럼 작고 아름다운 섬이 있었다는 것에 흥분 하였고, 이 아름다운 미지의 섬을 내 두 눈으로 목격한 감격은 그 후 세월이 갈수록 나의 내면에 깊이 각인 되고 있었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어느날 나는 울릉도에서 본당 신부로 지냈던 친구 사제로부터 이 섬에 관한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동해의 절해 고도 댓섬에는 주민이 열 여섯이 있다는 것과 그 아름답고 외로운 섬에 살고 있는 세 가족 가운데 두 가족이 서로 불목하며 불편한 관계를 맺고 살아 간다는 것이 였다". 그는 '인간의 비극'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고(故) 윤임규 사제, 그는 10여년 동안 대만에서 '역경의 생생사상(易經의 生生思想)'이란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하였고 불과 몇 개월 후 수녀들의 피정지도를 위해 중국 본토 감숙성 난주지역을 지나던 중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68년 신학대학 라틴과에서였다. 좀처럼 말이 없었던 그는 시를 쓰고 있는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육척이 넘는 키에 더없이 마른 체격, 유난히 큰 두 눈은 깊고 조용한 호수처럼 빛났다. 그는 나이 답지않게 매사에 신중하고 진지했으며 겸손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닌 그였지만 뜻과 의지가 분명하여 그 기품이 맑고 꼿꼿하여 우리는 그를 '허죽(虛竹)' 이라고 불렀다. 그의 이름대로 그에게서 나는 가끔 '댓잎에 스치는 바람소리' 같은 쓸쓸함을 엿보았다. 이러한 그를 나는 사랑했고 존경했다.
그는 나에게 '대나무 섬의 환상' 을 깨닫게 해 주고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는 서둘러 이 세상을 떠나갔지만 나는 오늘도 내 일상의 가장자리에서 '댓잎 사이로 일던 그 바람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나는 '그 눈에 서려있던 빛나는 고독'을 회상해본다. 어쩌면 그의 고독은 "서로 사랑하면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한 인간의 비극"을 바라 본 한 사제의 고독이었을 것이다.
댓섬은 오늘 우리 내면에도 있고, 가정에도 있고, 하느님의 자비로 담장을 두른 봉쇄 수도원 안에도 존재한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댓섬은 존재한다. 조광호(성베네딕도 수도회 신부, 월간 '들숨날숨'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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