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3년 도입된 '법정퇴직금제도'가 시행된지 50년만에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 퇴직금을 적립하지 않는 기업이 많아 도산한 기업의 근로자들이 퇴직금을 받지 못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도산에 이르지 않은 기업도 퇴직금을 주지 못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어 과연 '법정제도'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고 있는 것이다.
재계는 이참에 아예 퇴직금제도를 없애자는 얘기도 꺼내고 있다. 퇴직금뿐만 아니라 예전에 없던 고용·산재보험 등에 대한 기업부담까지 늘어 기업경쟁력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논리다.
정부는 가시적으로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는 법정퇴직금제도를 손봐야한다는데는 공감하지만 완전히 없애는데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 정부는 법정퇴직금제도를 '기업연금제도'로 전환한다는 계획을 통해 법정퇴직금 수술에 나설 방침이다. 하지만 노동계·재계 모두 탐탁치않은 반응이다. 법정퇴직금만 잃고 대체되는 혜택은 적을 것이라는 노동계의 우려에다 퇴직금요율 인하가 우선돼야 한다는 재계의 주장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법정퇴직금 개선논의 왜 나오나?
기업이 반드시 퇴직금을 적립하도록 법으로 정해놨지만 지켜지는 경우가 드물다. 퇴직금 적용대상자는 전국적으로 전체 취업자의 30%내외인 21만여개 업체 570여만명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기업체 기준으로 따지면 8∼16%가량, 노동자 숫자 기준으로 들여다보면 약 10%안팎의 퇴직금만 사외에 적립돼있다.
금융당국 통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 금융기관에 퇴직보험·퇴직신탁 등의 명목으로 사외적립된 퇴직금은 15조6천여억원. 하지만 전문가들이 분석한 자료를 빌리면 전국의 기업들이 노동자들에게 지불해야할 퇴직금은 약 83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사내에 적립된 퇴직금이 명목뿐인 '장부상'금액이라면 70조원에 가까운 퇴직금이 모자라는 것이다. 결국 안심하고 퇴직금을 받아나갈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얘기. 전국적으로 월평균 400여개 기업이 부도를 내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법정퇴직금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적쟎은 근로자들이 빈손으로 회사문을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법정퇴직금제도라는 간판을 걸고 있지만 퇴직금 혜택을 받는 5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는 전체 근로자의 30%에 머물러 취업자의 일부에게만 혜택을 주는 '소수대상법'이라는 비난이 일고 있는 상황도 퇴직금제도에 칼을 대야 한다는 목소리를 거들고 있다.
◇정부의 대안:기업연금제도
정부는 내년부터 법정퇴직금제도를 대체할 방안으로 '기업연금제도'를 도입키로 하고 시행방안 등과 관련, 전문기관에 용역을 의뢰한 상태다. 기업연금제도란 근로자에게 지급될 퇴직금을 사업주가 외부 금융기관에 적립, 금융기관이 관리토록하고 퇴직 후 연금형태로 지급하는 것. 사업주가 운영한다는 점에서 국민연금이나 개인연금과 구별된다.
기업연금제도란 크게 확정급부형과 확정갹출형으로 나뉜다. 확정급부형이란, 일정한 급부공식에 의해 약속된 연금급여를 보장하므로 이를 위한 기금운용과정에서의 손실위험은 사용자가 부담한다.
확정갹출형은 갹출에 의해 조성된 적립금과 운용수익에 따라 급여가 결정되므로 손실위험은 근로자가 부담한다.
노동부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일반적으로 대기업이 확정급부형을, 중소·신생기업들이 확정갹출제도를 많이 이용한다. 세계적추세는 확정갹출형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노동부의 설명이다.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기업연금제도의 장점은 퇴직 근로자에게 일정한 노후소득을 보장함으로써 국민연금과 함께 사회보장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 노후소득에 대한 다층보장체계를 구축한다는 시도다.
국민연금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퇴직 후 노후소득에 대한 우려가 큰 현실하에서 기업연금제도가 시행되면 퇴직후에도 생애소득의 약 70%정도를 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기업에게도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말이다. 현행 법정퇴직금제도의 경우, 근로자의 임금상승과 근속연수증가에 따라 퇴직급여충당금이 누적돼 기업경영상 잠재적 압박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기업연금, 근로자에겐 무엇이 달라지나?
세계적 추세를 볼 때 정부가 도입할 기업연금 방식은 '확정갹출형 기업연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운용실적에 따른 위험부담분이 근로자들에게 전가되는 제도여서 연금액이 불안정해지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확정급부형이든 확정갹출형이든 기업연금제도가 도입되면 연금 재원이 기업 바깥에 실제로 적립되기 때문에 기업이 망해도 근로자들이 연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지는 않는다.
퇴직금 누진제 적용 사업장 등 안정적 퇴직급 수급자들에겐 논란이 될 소지도 있다. 장기근속자에게는 현행 퇴직금 제도가 기업연금제보다 유리한 측면이 크다는 것이다.
누진제가 없는 사업장의 퇴직금은 퇴직 당시 30일분 평균임금에다 근무연수를 곱해서 결정되고 있다. 이 경우, 퇴직금은 임금상승률에 맞춰 커지기 때문에 기업연금도 보험료를 운용해 거둔 연평균 수익률이 연평균 임금상승률 수준은 되어야 근로자들에게 불이익이 없다.
현재 우리나라의 명목임금 상승률은 90년대를 기준으로 7%대. 지난 99년 도입된 퇴직보험의 지난 해 수익률은 확정금리형(보장금리 6.5%)이 대체로 7%대여서 연평균 임금상승률과 큰 차이가 없다. 기업들이 퇴직금 재원을 때맞춰 기업연금에 불입하도록 유도한다면 근로자들로서는 퇴직금의 안정성이 현재보다 높아지는 셈이다.
우려도 있다. 기업연금 운용과정에서 주식투자로 인한 손실발생시 연금이 줄어들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점.
정부는 이에 대해 주식투자 비중을 크게 높이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며 우리나라 주가가 외국기업에 비해 저평가돼있어 오히려 주식투자를 늘리면 연금액이 불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미국의 경우 기업연금기금의 53%가량이 주식에 투자되고 있으며 지난 수년간의 주가상승으로 수익률이 시중금리를 웃돌았다는 것.
◇향후 전망
퇴직금지급의 안정성을 오히려 높일 수 있다는 정부의 설명에도 불구, 노동계의 반응은 아직 차갑다. 근로자 퇴직금의 안정성 확보라는 측면보다는 기업연금도입을 통해 퇴직금을 증시에 유입시키려는 속셈때문에 정부가 이 제도를 도입시키려한다는 것.
더욱이 대기업·공기업·금융기관 등 지금까지 안정적인 퇴직금을 확보해왔던 근로자들도 적지 않아 이들은 현행 제도에 대한 집착이 강한 상태다.
재계도 퇴직금 요율을 내리거나 국민연금과 통합해 운영해야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견. 퇴직금(연봉의 8.3%), 국민연금(4.5%), 건강보험(1.7%), 고용보험(1.5%), 산재보험(1.65%) 등의 간접임금 비율하에서는 기업들이 꼼짝달싹 못한다는 것.재계는 이 때문에 퇴직금 요율을 현행보다 내린 뒤 기업연금으로 전환하고 사외적립에 대한 세제혜택도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일단 전면도입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이와 관련, 현행 퇴직금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임의적 기업연금제도를 도입, 세제혜택을 부여해 단계적으로 법정 강제 기업연금제도로 전환시키는 '제도교체형 전환', 새로이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근로자에 대해서만 법정 강제 기업연금제도를 도입하는 '세대교체형 전환' 등 4가지 정도의 전환 모형을 연구하고 있다.
최경철기자 ko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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