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조각의 선구자...멕시코 문명 모태
흡사 콘크리트 전신주가 온 산을 뒤덮은 듯한 선인장 군락을 지나며 하루 종일 달려도 차창 밖은 온통 먼지와 자갈, 마른 풀 뿐이었다. 떼오띠와깐, 몬떼알반 등 지금까지 둘러본 유적지에서도 물 한 방울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사진기보다 물병을 먼저 챙기고 창이 긴 모자를 더욱 눌러쓰곤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유적지마다 우물이나 물을 저장한 구조물부터 먼저 찾게 되었으며, 쉽게 그들이 남긴 거대한 유적과 그처럼 애타게 비의 신을 노래한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그리할바강 따라 문명 발달
이처럼 메마른 멕시코. 물이 없는 멕시코에 대한 인상은 태평양 연안을 지나 치아빠스주에 이르면서 달라졌다. 멕시코에서 두 번째로 긴 그리할바강이 지나는 수미데로 협곡, 울창한 원시림, 장대비를 맞으며 아구아 폭포를 보면서 새로운 멕시코의 모습을 만나게 되었다. 대서양의 멕시코만 연안인 따바스꼬 주는 저지대의 눈 닿은 곳 모두가 늪과 호수였다.
그 다음에 들른 곳은 '아름다운 도시'라는 뜻을 담고 있는 비야에르모사였다. 이곳은 따바스꼬 주의 주도이며, 시가지 한가운데를 그리할바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이름 그대로 아름답고 깨끗한 도시이다. 길을 따라 아름드리 벤자민 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온 시가지가 열대 식물로 푸르게 뒤덮여 있어 더욱 시원하고 넉넉하며 풍요롭게 보였다.
일찍이 낙동강은 그 유역에 신라와 가야 문화의 꽃을 피우고, 해안을 통한 외래 문화를 내륙 깊숙이 전파하는 중요한 루트가 되어 '영남의 젖줄'이라 일컬었다. 그리할바강은 멕시코의 낙동강이라 할 만하다. 따바스꼬 주 일대에 이룩된 멕시코 최고의 올메까 문명을 북쪽의 고원 지대와 남동쪽의 유카탄 반도로 전달하여 훗날 마야와 아스떼까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올메까 문명의 전기(BC 1200~900)에는 산 로렌소가 중요한 센터였으며 중기와 후기(BC 900~300)에는 라벤따가 번성하였고, 종말기(BC 300~서기전후)에는 뜨레스 사뽀떼스가 대표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1950~60년대에 이 곳의 산 로렌소와 라벤따 지역의 유적 발굴이 성과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곳이 메조 아메리카 문명의 모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로 주변 문명의 많은 요소들이 여기서 퍼져갔다는 견해가 강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연안.과테말라 등 남부 지역에 기원을 두는 설도 뿌리깊게 남아있어 문명 발생 과정에 대한 독립 발생설과 전파설은 그 논쟁이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올메까는 '고무나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나후아 어(아스떼까 공용어)로서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에 도착하였을 때 이 곳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메조 아메리카 문명 모태 역할
올메까 문명이 사라진 후에도 올메까의 예술은 기원후 6, 7세기까지 같은 지역에 계속 발전되어 메조 아메리카의 다른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상당 기간 문화적 전통이 이어졌다. 이 지역은 멕시코의 다른 지역과 달리 강수량이 많고 홍수의 피해도 많은 곳이다. 날씨도 연중 30℃ 내외이며 땅은 늪지대와 강의 지류로 인하여 교통상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어 일찍부터 인간이 좋은 삶을 살아가기에는 그렇게 적절한 곳은 못되었다. 이러한 자연적 어려움 속에서 높은 문화 수준과 독특한 예술 양식을 꽃피웠기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고 하겠다. 이들이 남긴 대표적 유물은 거대한 석조 인물상과 반인 반 재규어상, 어린이와 난쟁이 토우 등으로 20세기 중반에야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비로소 올메카 문명이 특별히 주목받게 되었다.
올메까 문명의 중심지였던 산 로렌소, 라벤따, 뜨레스 사뽀떼스 등지에서 주로 발견된 이 유물들은 그 곳의 환경이 열악하고 또 주변의 석유 개발 등으로 거의가 이 곳 비야에르모사의 라벤따 공원 박물관과 깔로스 뻬이세르 기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시인이 박물관 지어 유물 보존
우리는 멕시코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들을 원래의 장소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긴 하였으나 고고학자이자 정치가이며, 우리에게 시인으로 더욱 알려진 깔로스 뻬이세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라벤따 공원 박물관으로 갔다. 일행이 박물관 입구에 도착한 때는 관람 시간이 훨씬 지난 후였으나 머나 먼 서쪽 나라 한국에서 왔다고 사정을 말하니 어딘가 한참동안 연락한 후 특별히 입장을 허가해주었다. 비야에르모사에서 태어난 깔로스 뻬이세르는 항상 그가 올메까와 마야인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강조하였다. 또한 자신의 뿌리에 대한 관심과 긍지를 갖고 멕시코의 자연을 사랑하였으며 전통, 종교, 모든 일상 생활에까지 관심을 갖고 찬양하였다. 그는 멕시코 문명의 뿌리인 올메까의 유물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특히 유물 출토지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악어와 선인장 등을 비롯한 그곳의 동,식물까지 이 곳 강 언덕으로 옮겨와 똑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박물관으로는 가히 세계적 수준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뻬이세르는 1951년 비야에르모사에서 고고학 박물관을 창설한 이래 빨렝께 박물관을 비롯, 모랠로스, 멕시코 시에 2개의 박물관 등 여러 개의 박물관을 만들고 자신의 수장품을 기증한 올메까를 사랑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0~50t 무게 석조두상 눈길
이 곳에 전시된 올메까 유물 중 단연 눈길을 끈 것은 거대한 석조 두상이다. 이 두상은 지금까지 멕시코만의 올메까 문화권에서만 20여 곳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크기가 대부분 1.5m~3.5m 사이이며 무게는 10~50t에 이른다. 이 곳 박물관에 그 중 대표적인 4개가 전시되어 있고 나머지는 멕시코 시티의 인류학 박물관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석재는 인근의 뚜슈뜰라 화산에서 나온 현무암으로 조각을 하기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기원전 10세기경 금속을 사용하지 않았던 시기의 석조물로는 놀라울 만큼 정교하고도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얼굴 전체의 모습은 둥그스름하고 살이 쪘으며 눈은 크면서 동양적인 요소를 가졌고, 입술은 두꺼워 흑인종을 상상하게 한다. 또 광대뼈가 약간 튀어 나와 있고 코는 낮은 편이며 입술은 꼭 다물고 입가는 푹 들어갔으며 미간을 찌푸려 전체적으로 아주 강인한 인상을 준다. 이마의 윗 부분은 띠를 둘러 투구를 쓴 것 같은 장식을 하고 있어 단단하고도 힘이 있어 보인다. 이처럼 엄청난 크기의 석조 두상만을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아마 올메까인들이 그들의 지도자나 무사를 기리며 오랜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돌을 깎아서 세운 기념비의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올메까나 멕시코 고대 문명을 나타내는 모델로 으레 내세우는 이 거대한 사람 머리 상은 멕시코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원주민 인디오의 모습과도 거리가 멀다. 20여명의 우리 일행 중 필자를 포함한 이씨성을 가진 사람들은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공교롭게도 모두 머리가 클 뿐 아니라, 입술도 조금은 두껍고 눈도 큰 편이어서 떠날 때부터 올메까 가문이니 삼총사니 하며 한바탕 우스갯소리로 바쁜 일정의 피로를 다소나마 덜 수 있었다.
뻬이세르의 혼이 깃든 기념관과 박물관에 남아있는 다양한 재규어상과 비취와 점토로 만든 평화스런 어린아이 모습의 유물을 보면, 마야를 비롯한 멕시코 전역의 엄청난 석조물들의 모두가 돌조각의 선구자인 이 올메까인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자신들의 민족 문화가 지닌 독특한 성격을 보존하고 이어가려는 남다른 뜻을 가졌던 뻬이세르의 웅대한 포부가 잊혀지지 않는다.
글:이형우(영남대 교수)
사진:최종만(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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