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삶-30대 미혼 임신녀 하정인씨

보건복지부 추산에 따르면 이 땅에는 매년 5천명 이상의 미혼모가 발생한다. 언제부터인가 드라마 속에서도 미혼모, 혼전 동거는 당당한 한 삶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미혼모와 혼전 임신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미혼모의 출산과 입양을 돕는 시설 대구 혜림원에서 만난 30대의 하정인(가명)씨. 그녀는 이곳의 혼전 임신녀 40여명 중 맏언니 축에 든다. 충청도가 고향인 그녀는 부모님께 대구의 한 복지시설에 서너 달쯤 자원봉사를 하게됐다고 이르고 이 시설에 몸을 맡겼다.

출산을 보름 앞뒀지만 하씨는 만삭의 여인 같지가 않다. 배만 약간 불러보일 뿐 얼굴엔 붓기도 없고 여느 임신부처럼 희멀겋지도 않다.

"겁이 나니까요. 이 무서운 일을 혼자 감당해야 하잖아요" 아기 아빠도, 가족도 없는 곳, 첫 아기를 가진 그녀에게 전문의의 정기검진과 임신부에게 가장 알맞게 짜여진 식단만으로는 별 위안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이곳 혼전 임신녀 대부분은 배만 부를 뿐 다른 임신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갖지 말아야 할 생명을 가진 육신은 스스로 방어하는 법을 배우는 모양이다.

"사고였어요"그녀는 임신을 빌미로 아기 아빠에게 결혼을 요구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결혼할 입장이 못되는 남자, 떼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하씨도 그랬지만 미혼모가 아기를 원해서 출산하는 경우는 드물다. 바보같아 보이지만 미혼 임신녀들은 초기엔 자신이 임신한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서너 달 생리가 없어도 긴장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죠. 배가 조금씩 불러 와도 대부분 부정해요. 설마 그럴 리 없다, 많이 먹었더니 살이 찌는가 보다… 그러다가 배가 많이 불러오면 대책이 없는 거죠" 하씨는 미혼 임신녀들 중에는 임신사실을 알고도 지울 돈을 마련하지 못해 세월을 보내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어떻게 내가 이 지경이 됐나 싶어요" 하씨는 평소 모습과 달리 쉽게 울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낸다. 쇠약해진 몸과 마음 탓일까. 그녀에게는 겁 많은 동네 강아지처럼 자기 구역을 정해 놓고 누구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임신을 하면 잠이 쏟아진다는 데 하씨에게는 잠도 없다.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을까 싶지만 한방에 같이 지내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으로 밤을 꼬박 새운다. 그러다가 누군가 훌쩍거리기라도 하면 모두 입을 다물고 만다.

매순간이 괴롭고 안타깝지만 하씨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아기의 태동. 날이 갈수록 힘이 붙는 발길질에 우습게도 쉽게 울음이 터진다. 단 한번만이라도 아기 아빠가 이 배에 손을 얹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기 아빠가 사다 준 시큼한 과일을 맛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늙은 어머니의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은 곧 '내가 키워야겠다'는, 자신이 감당할 수도 없는 상황으로 발전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변해요. 키운다, 아니다, 불행해질 뿐이다, 그래도 키운다, 아니다…" 하씨는 매일 일기를 쓴다. 이 괴로움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아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사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요즘엔 십자수로 턱받이를 만들고 있다. 입양 보낼 때 함께 보낼 생각이다.

"책도 많이 읽고 좋은 영화도 많이 보려고 노력해요. 입양 보내고 나면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그 전에 뭐든 해야지요" 예전에는 공포 영화를 좋아했다는 하씨, 그러나 아기가 놀랄까봐 요즘은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했다.

출산을 앞둔 하정인씨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진통'이 아니다. '과연 나는 출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죽는 날까지 무시로 떠오를 아기 생각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의 불안해하는 눈은 '진통'을 너머 먼 훗날을 향하고 있는 듯 했다.

"먼저 나간 사람들이 그랬어요. 얼굴도 보지 말고 그냥 보내라고…" 하씨는 제 몸 속에서 나올 아기 얼굴을 쳐다보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한 얼굴을 가슴에 남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결코 맞닥뜨리지 않았으며 좋았을 미혼모의 삶. 이 땅의 수많은 '하정인'은 쏟아지는 장맛비 속을 우산도 없이 걸어가야 할 처지에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 기자에게 그녀가 덧붙였다.

"다음에 우연히 마주치게 되더라도 절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습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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