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중·고교는 조용한 전쟁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말대로 1년에 네번씩 닥치는 '전투' 가운데 1학기 기말고사 시기인 것. 얼굴이 퉁퉁 붓고, 눈에 피로가 가득한 학생들이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시험을 치른다. 학생들의 표정에는 긴장감마저 흐른다. 한 과목이라도 실수하면 고교, 대학 가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대입 내신제는 전국적인 문제로 차치하고, 3년전부터 대구시 교육청이 도입한 고입 내신제를 좀 더 들여다보자. 연합고사 한 번에 인문계냐, 실업계냐, 어느 고교냐가 갈리던 불합리함을 배제했다고 하지만, 부작용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사실 내신제는 한 번의 선발시험으로 중·고교 학업 성취도를 판정하는 데 따른 위험을 피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그러나 모든 교육 제도는 학교 현장에 가면 취지나 도입 목적을 잃어버리는 게 우리 현실. 내신제 역시 중·고교 전 과정을 입시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고 있다.
우선 두드러지는 건 갈수록 사교육 의존도가 높아진다는 점이다. 지난달 말 대명동 한 학원. 중학생들이 한 뭉치의 유인물을 들고 삼삼오오 빠져나오고 있었다. 학원에서 만든 기말고사 예상 문제지였다. 학생들은 "이 학원은 족집게로 소문났다"면서 "큰 힘 들이지 않고 내신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는 학원에 안 다닐 수가 없다"고 했다.
중학생 대상 학원들은 고입 내신제 도입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중학생들의 경우 학원에 가느냐 안 가느냐, 어느 학원에 가느냐에 따라 학교 시험 성적이 크게 달라진다. 중학생 대상 학원들 가운데 잘 나간다는 학원들은 대부분 시험 문제의 절반 이상을 맞춰 버리는 기가 막힌 '족집게' 솜씨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한 학원 원장은 "참고서와 문제집, 여기에 지난 몇 년 동안 그 중학교에서 출제된 문제지를 더해 분석하면 예상 문제가 빤하다"면서 "학교 시험 대비를 얼마나 잘 해주느냐에 따라 학원의 성패가 갈라진다"고 했다.
학원들의 솜씨가 갈수록 좋아지다 보니 시험이 끝나고 나면 문제 유출 의혹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지난해 2학기말 시험문제가 유출됐다고 제보해온 한 중3생은 "학원에서 주는 예상 문제지를 달달 외운 본 애들이 혼자 열심히 준비한 애들보다 점수가 더 잘 나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억울해했다.
내신제의 또다른 문제는 학생들에게 '슈퍼맨' 되기를 강요하는 점이다. 국어, 영어, 수학 등은 물론 음악, 미술, 체육까지 전 과목을 골고루 잘 해야 한다. 음악 과외, 체육 과외니 하는 얘기가 한편에서는 '우스개'로 들릴지 모르지만 해당 학생과 학부모들은 그만큼 내신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특기와 적성을 강조하는 2002학년도 이후 입시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전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요구하는 내신제가 변함 없는데, 한 분야에서만 소질을 보여도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건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
대구 동·서 지역간 학력 격차도 고입 내신제의 문제로 제기된다. 전반적으로 수성구 지역 중학교의 학력이 높지만 현 제도는 학교간 학력 차는 반영하지 않는다. 학교 내에서 상위 몇%에 포함되느냐로 결과를 내기 때문에 수성구 지역 학생들은 그만큼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교사들은 내신제를 폐지할 수 없다면 수정이라도 급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입시라는 전쟁터로 내몰리는 현실에서 무슨 특기·적성을 말하고 어떻게 노벨상 수상자를 기대할 수 있느냐는 것. 사교육에 짓눌려 신뢰를 갈수록 잃고 있는 공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내신제 수정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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