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기홍칼럼-많을수록 모자란다

최근 판교 신도시 문제를 둘러싸고 집권당 내부가 뒤숭숭한 모양이다. 판교벤처단지의 규모를 10만평으로 할 것인지, 60만평으로 할 것인지가 쟁점이라고 한다. 단지의 규모가 문제라기보다 애시당초 신도시 개발을 결정한 것부터가 잘못이다. 수도권 집중을 억제하겠다는 정책의지가 실종되어버린 또 하나의 표본이다. 항상 이런 식이다. 물론 수도권 개발론자들의 주장에도 일부 일리가 있다. 수도권의 택지난이 심각한 것도 사실이요, 급한 김에 상대적으로 용이한 수도권의 경쟁력 강화를 통해 국가경제의 회복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택지 공급이 원활해진다고 택지난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택지의 공급은 오히려 수도권 집중을 가속화시킴으로써 택지난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 따름이다. 도심에 주차장을 많이 만들수록 도심 주차난이 더욱 심각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건축법에는 건물 규모에 따라 설치해야할 주차장의 최저 면 수가 정해져 있다. 주차 공간의 확대를 통해 주차난을 해소해 보자는 생각이겠다. 독일의 경우는 이와 정 반대다. 그들은 도심에 건축을 하는 경우 건물 규모에 따른 주차 면 수의 최고 한도를 규정하고 있다. 많을수록 모자라는 법이요, 적어야만 비로소 넉넉해질 수 있다는 지혜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여유를 가진 자만이 지혜로울 수 있다. 발등의 불끄기에 바쁜 사람에게 지혜롭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당장에 '빨리빨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조급하게 서두른다면 도심에는 주차장을 자꾸 늘리고, 수도권에는 계속해서 대량의 택지를 공급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이제 끊어야 한다.

수도권 개발론자들의 경쟁력 논리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왜곡된 수도권의 경쟁력에 기대어 국가경제를 운영하겠다는 말인가? 지금 당장 수도권이 기타 지역에 비해 경쟁력의 우위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계속해서 수도권에 집중 투자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라는 말이겠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국가 경영의 발상법이 아니다. 개별 기업이야 돈과 정보가 집중되어 있는 수도권에 투자하는 것이 효율적이겠지만, 국가 경영의 차원은 달라야 한다. 국내 100대 기업 본사의 95%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현실을 그대로 둔 채 국가경쟁력을 운위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단기적 대증요법에만 매몰된 채 지난 날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산업화의 막차를 탔던 우리가 여유를 부릴 처지에 있지 못했던 것은 그렇다고 치자. 이미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었고 탈산업화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지 않은가. 새로운 시대는 다원화와 다양성의 시대다. 집중이 아닌 분산의 시대다. 국토의 10% 남짓한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모여 복닥대는 현재의 구조로는 새로운 시대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전 국토를 수도권화 할 것인가? 수도권 확대 정책은 이제 제발 그만 두자. 세계화는 동시에 지방화를 의미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제부터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서울보다 살기 좋은 지방이 육성되어야 한다. 지방 곳곳에 세계 일류의 인재들이 포진하여 각자의 잠재력을 한껏 펼쳐 보일 수 있도록 재구조화 되어야만 우리에게는 비로소 미래가 있다.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한 걸음 물러서자. 좀 더 여유롭게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지혜로워지자. 발등의 불도 문제지만 머잖아 집이 송두리째 타버리게 생기지 않았는가. 많을수록 모자라는 법이다.

권기홍 영남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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