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헌영 세상읽기-국론분열과 사회혼란 조성

낡아빠진 프랑스 농담 한 토막.네 남자가 서로 자기 직업이 더 오래된 유서 깊은 성업이라고 우기게 되었다. "나야말로 가장 먼저 생겨난 천직이지"라며 의사가 말했다. "신이 이브를 창조코자 아담의 갈비를 잘라낼 때 이미 있었으니까".

"아니지"라고 찍자를 다는 건축가 왈 "세계를 창조하고 조직화하는 일은 바로 건축가의 임무가 아닌감". 듣고 있던 철학자가 나섰다. "그대들 다 착각하고 있어. 세계를 창조하기 전에 혼돈이란 관념이 있었는데, 그걸 만든 게 바로 철학이지". 잠잠하던 정치가가 나섰다. "정말 그래. 바로 그 혼돈을 창조한 게 누구게?"

요즘 정치인들이 빈번하게 동원하는 '국론 분열'과 '사회혼란 조성'이란 술어는 우리 귀에 너무나 익은 닳아빠진 말로, 역대 군사독재 정권이 항상 야당과 민주화 운동권을 향하여 모든 언론매체와 공권력을 동원하여 협박용으로 썼던 전시대의 유물이었다. 아직도 상대편을 공격하는 무기로 이 말이 등장하는 것은 독재 통치의 후유증이자 무의식의 발로이다.

그때는 유독 여당이 야당의 공격용 주무기였던데 비하여 지금은 여야가 서로 상대를 지칭하는 술어로 둔갑했다는 점과, 특히 야당이 당당하게 여당을 공격하는 것으로 봐 우리 정치의 변모를 실감할 수 있다. 문제는 정치인들의 이런 논쟁에서 국민들은 진실을 찾으려 하지 않고 실제 이상의 '혼란'만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독재체제에서는 혼란도 국론 분열도 있을 수 없기에, 따지고 보면 이런 발상 자체가 전체주의적인 것인데, 국민들도 은연중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란 견해의 차이와 다양화가 기본조건인지라 결코 조용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군부독재 체질에 익숙한 우리는 집권층이 제안하면 박수치며 찬양하는 '국론 통일'에 너무 익숙해 왔다. 이 줄에서 벗어난 이단은 분열과 혼란 조성자로 잔혹한 처벌을 받았다. 그게 옳았을까? 이제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는 아버지 말 한마디로 가족 전체가 숨을 죽이던 때가 아니다.

오늘의 우리 처지를 자유민주주의의 걸음마 단계에서 빚어지는 필연적인 과정으로 보지 않고 지난 시절의 일사불란한 박수 체제를 그리워한다면 그 가치관은 시대역행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결정만이 진정한 국론이고 상대편은 분열이라는 고정관념도 비민주적인 독재의 유물이다.

물론 진짜 혼란 조성과 국론 분열의 조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을 방문한 황윤길과 김성일의 견해 중 어느 쪽을 '국론'으로 정하느냐는 판가름은 숫자도, 언론도, 권력도, 특정 지역 출신도, 특정 인물도, 특정 계층도 아닌 역사적인 진실을 보는 눈으로, 여기에는 철저한 민족국가 이익이라는 대원칙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굳이 김성일의 주장만이 '국론'이고, 황윤길은 '분열'이라는 식의 착각은 진짜 국론 분열로 역사의 비극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경계해야 될 점은 오히려 만장일치식 '국론'이다. 국민의 여론과 바람직한 민족적 이익을 위한 역사의식에서 토론과 협상을 통하여 국론은 창조되는 것으로, 그건 여당의 전가의 보도도, 야당의 공격용 병기도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란 국론을 창조해 내는 기술이며, 민주 사회에서의 정치가란 분열과 혼란을 국론으로 에너지 전환시킬 줄 아는 고도의 테크니션이다. 그런 기술이 없는 정치가일수록 협상과 타협은 않고 분열과 혼란만 조성하려 한다. 정작 이런 작태를 극복해야할 정치인들이 도리어 조장하는데서 정치불신은 싹튼다.

여야가 모두 진정한 국론은 자기편이라고 행복한 착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설사 그렇더라도 대화와 설득과 토론과 탐구의 자세는 필수적이며, 아무리 자유민주주의의 다양한 견해지만 국가와 민족의 이익과, 전진하는 역사의 향방을 거역하는 일은 편견으로, 다양한 견해와는 엄연히 다르다. 제발 국민들로부터 정치인을 퇴출시키고 아예 외국에서 수입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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