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간데스크-영웅을 기다리며

봄날씨만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다. 한여름 장마라지만 이틀만 비가 쏟아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그리워지고 이틀만 해가 내리쬐면 숨이 턱까지 차올라 불쾌지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짜증이 가시지 않는 요즈음이다.

여기다 가뭄과 수해 등 뉴스는 금방 세상이 어찌 될 것처럼 어지럽다. 언론사 세무조사로 빚어진 거대신문과 정권과의 갈등, 신문사와 방송사간 명분다툼, 끝나지 않는 의약분업 파장, 마무리되지 않은 구조조정의 후유증 등이 뒤엉켜 국민들을 편가르고 있다.

현실 세계는 영화속보다 훨씬 더 희화적이다. 너도 나도 서로의 '시다바리'가 될 수는 없다고 극한투쟁을 벌이는 곳은 주먹세계만이 아닌 듯하다. 신문사 세무조사는 느닷없는 X논쟁으로 확대돼 지식인들까지 더욱 갈갈이 찢어놓더니 거대 신문사 명예회장부인의 죽음이 또다른 내연의 불씨가 될까 우려된다.

이럴 때 박찬호의 삼진 행진은 더위와 짜증까지 한꺼번에 씻어가버리는 청량제다. 미국 프로야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팀에서 선발 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올스타로 선발되면서 그 진가를 다시 검증받았다. 당초 990만달러이던 몸값이 올스타 출전 보너스 10만달러를 보태 1천만달러를 채웠고 내년 FA(자유계약선수)가 되면 더욱 올라갈 것이라는 현지 소식이고 보면 그저 대견스러울 뿐이다.

연봉이 우리돈으로 130억원이니 하는 천문학적 단위의 몸값도 몸값이지만 그가 이역만리서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하는 쾌거야말로 어디 돈으로 따질 수 있을까. 나이답지 않게 기른 턱수염하며 꾹 다문 입술, 깊숙한 눈매, 거기에다 자신만만한 피칭 자세에는 그냥 프로야구 선수 이상의 카리스마마저 엿보인다. 가뜩이나 왜소해지는 현대인들에게 박찬호는 영웅이다.

박찬호가 등판할때면 지구 반대쪽 한국에서도 열심히 성원을 보낸다. 국민 개개인에게 위안을 주며 국민 전체를 하나로 묶는 장한 일을 하는데 대한 격려다. "이렇게 짜증나게 더운데, 찬호 너라도 시원한 게임 한 번 펼쳐주라"고 성원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에게 영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중에는 암울한 군사독제와 권위주의 시대에 수많은 투사들이 목숨걸고 따랐던 정치지도자들도 있다. 비록 지금 TV연속극에 나오는 고려나 신라의 장수들처럼 갑옷을 입고 칼과 창을 휘두르며 적진을 유린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영웅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국민들을 배신했다. 선거때면 나타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겠다고 등장한 영웅들도 국민들을 실망시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의 영웅 박찬호는 결코 국민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스포츠가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는 문화이어서만은 아니다. 박찬호는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에 나오는 엄석대처럼 조작된 영웅이 아니다. '월터 레이피버' 코넬대 교수가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을 "다국적기업의 자본과 거대 미디어가 합작해서 만들어 낸 신화"라고 분석한 데 비교하면 박찬호는 순수하다. 자본주의와 미디어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조작되지 않았으니 국민을 속일 리 없고 국민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형편없는 투구로 경기를 망치기도 하고 아직 9승을 못 해 답답해하지만 19일 등판해서는 9승을 해 낼 것으로 국민들은 믿는다. 국민들은 또 박찬호가 비록 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상대를 비난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연마해 다음을 대비할 것이라고 믿는다. 타고난 체력에다 운이 따라 준 것이 오늘의 박찬호라면 그 박찬호를 만든 것은 그 스스로의 노력과 그 노력을 지켜보고 채찍질해주는 국민들이 뒤에 있기 때문이다. 같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중인 일본의 스즈키 이치로를 일본 국민들은 메이저리그 올스타 투표에서 최다득표 선수로 만들어냈다.

어제 용마고의 우승으로 막을 내린 제23회 대붕기 고교야구대회에서도 제2의 박찬호를 꿈꾸는 수많은 젊은 선수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성공을 기대한다. 그러면서 스포츠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국민적 영웅이 탄생하길 기대한다.

그나저나 국내 프로야구 후기리그에서는 삼성 이승엽이 홈런포를 팡 팡 터뜨려야 할 텐데. (이경우 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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