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1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 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시인 자신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쓴 소위 데뷔작이다. 고려가사 '가시리'에서부터 시작해 소월의 '진달래 꽃'과 만해의 '님의 침묵' 계보를 잇는 연애시라고 자작시 해설에서 밝히고 있다.

내가 그대를 생각함이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지만 사실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광대무변한 자연 현상이 결코 사소한 일일 수는 없다. 역설이다. 이처럼 사랑에는 역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잊고 있는 경우가 많다. 김용락〈시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