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기홍 칼럼-정치권 쇄신의 계기

국회의원 비례대표 제도가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 판결을 받았다. 전국구 의석 배분 방식은 위헌이요, 1인1표 비례대표제는 한정 위헌이라는 판결이다. 비례대표제 자체는 헌법이 요구하고 있는 사항인지라 결국 정당명부식 1인2표제의 도입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여야는 벌써부터 손익 계산에 여념이 없다. 같은 1인2표제라 하더라도 그 구체적 모습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여야의 이해관계 조정에 따라 과연 어떤 선거법이 탄생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옥동자가 탄생할 수도 있고, 기형아가 탄생할 수도 있다.

이번 헌재의 판결을 계기로 정치권을 쇄신할 수 있는 새로운 선거법이 탄생하기를 기대한다. 정치에 대한 불신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사람, 새로운 세력의 정치권 진입이 불가능한 선거 제도에 기인한다. 제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기존의 정당 구조속에 포섭되기 전에는 당선이 불가능한 게 현재의 선거 제도다. 이러다보니 촉망받던 정치 신인도 출발부터 그 나물에 그 밥이 되고 만다. 제대로 정치권을 쇄신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사람은 아예 정치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구조화되어 있다.

정당명부식 1인2표제가 제대로 도입된다면 신생 정당의 의회 진출이 가능해 진다. 독일의 경우를 보라. 녹색당이 제3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연립 정권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지 않은가. 환경운동이 유독 독일에서만 활발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만 녹색당이 현실적 정치 세력으로 뿌리 내리고 있다. 독일식 정당명부제의 결과다. 녹색당 의원 중 그 어느 누구도 지역구에서 당선된 사람은 없다. 우리식 제도였다면 녹색당은 한명의 의원도 배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도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떤 신생 정당이 지역구에서는 한명도 당선시키지 못하더라도 정당 득표율 7% 정도를 얻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수준의 의석을 확보한다면 어떻게 될까?

군소 정당의 난립, 이념정당의 등장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지나친 난립은 정치적 안정을 해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정당 득표율 하한 제도를 적절히 활용한다면 난립에 의한 불안정은 기우에 불과하다. 이념정당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겠으나 이념정당이 등장한다고해서 안될 일은 또 무엇인가. 정당이란 원래 같은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이념을 정치적으로 실현시키고자 노력하는 결사체가 아닌가. 현재의 우리 정당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된 정당이 출현하면 곤란하다는 말인가. 보스 개인의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조직된 정당 구조를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정치권 쇄신을 기대할 수 없다.

정당명부제가 도입되면 지역패권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과연 그럴까? 지역성 이외에 다른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현재의 정당 구조 때문에 오히려 지역패권주의가 극복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신생 정치 세력이 성공하자면 지역성과 무관한 이슈로 범지역적 지지를 얻어내야만 한다. 정당명부식 제도에서는 인물 위주의 선거가 이슈 중심의 선거로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치판은 까마귀 골이니 백로는 가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하는 한 정치권 쇄신은 불가능한 일이다. 정치가 성숙하지 못하고 나라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까마귀 골 정치판을 백로 골로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뜻있는 백로들도 까마귀들과 함께 보금자리를 틀 수 있을 정도로는 바꾸어야 한다. 헌재의 선거법 위헌 판결은 분명히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다시 정치권의 기득권 수호를 위한 야합으로 이 계기가 일실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눈을 부릅뜨야 할 때다. 영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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