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이로소이다'를 비롯한 20여편의 시를 남겼고, 신극단체 토월회 동인으로 연출과 연기를 병행했던 노작 홍사용(1900~1947) 기념관이 이달초 문을 열었다. 일제시대에 친일의 길을 걷지 않고 민족적 정신을 지킨 몇 안되는 문인 가운데 한명인 노작 기념관이 들어선 곳은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석우리이다.
석우리는 남양 홍씨 집성촌이며 8세에 이사온 노작이 휘문의숙에 입학한 17세까지 살던 집터와 묘소, 시비가 있다. 이번에 노작 기념관이 문을 열게 된 것은 노작의 먼 친척이 대지 500평짜리 전통한옥을 무상으로 내놓는 '발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개관식 때는 창작 뮤지컬 '나는 왕이로소이다' 공연, 노작 일대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조선 사람은 조선을 알아야 한다' 등이 방영돼, 화성시민들은 오랜만에 '문화적 자부심'을 한껏 높일 수 있었다. 노작기념사업회는 이곳을 박제된 공간으로 운영하지 않고 지역 문인들을 위한 창작공간이나 마당극 공연무대로 제공, 화성시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살려나가는 공간으로 가꾸려는 포부를 갖고 있다. 노작 타계 54년만에 노작기념관이 세워진 것을 가장 반가워한 사람들은 뜻밖에도 문화예술인들이 아니라 화성시민들이었다. 화성시민들은 "수년전에 터진 연쇄살인사건이 해결되지 않고 있어서 화성시에 사는 것이 무섭고, 남부끄러웠는데 이제야 이곳에 사는 것이 당당하고 자랑스럽다"고 입을 모았다. 이름조차 밝히기를 꺼린 노작의 먼 친척 한사람이 노작을 영원히 되살리는 것은 물론 추락했던 도시의 이미지까지 회복시킨 것이다.
노작 기념관 건립에서 보듯이 문화 공간, 역사 공간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적 안정과 사색, 그리고 창조성을 키워나가는 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기에 참으로 소중하다. 같은 공간에서 살았던 선조들의 삶이 배어 있는 옛길, 옛집, 산책로, 골목길, 공원, 서점, 카페, 자연, 고가 등은 시간의 퇴적물이 빚어내는 신기한 마술로 주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해주며 지역에 대한 자부심까지 덤으로 준다.
서로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익명성 속에서 살아가는 도시는 지나친 경쟁과 번잡한 분위기를 피할 수 없어서 역설적으로 세월의 이끼가 낀 공간의 필요성이 더해진다. 땀과 기억, 아름답고 슬픈 사연이 배어 있는 역사문화공간은 경제적 가치(economic value)는 없지만 엄청난 정서적 가치(emotional value)를 지녀서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소중함을 지닌다. 그래서 오래된 곳이 소중하며 오래된 곳을 간직하지 못한 도시는 이미 인간적인 도시, 문화적인 도시가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간과 사람의 연관성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처럼 소중해서 전쟁이나 지진 등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역사적 장소를 보존하는 것이 도시운영의 기본원칙이다. 신세대와 구세대가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끈으로 연결되고, 잠시만 일상에서 벗어나면 사색과 휴식을 보장받는 도시라야 언제라도 떠나고 싶은 도시가 아니라 계속 살고 싶은 도시, 찾고 싶은 도시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대구는 어떤가. 먼 옛날은 차치하고라도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살았던 죽농, 석재, 주경, 이인성, 현진건, 이장희, 이상화 등 대구가 배출한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살던 흔적을 느낄만한 기념관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 인물에 대한 기념관 부재'라는 불명예는 그렇다치고, 최근 들어 역사성을 지닌 공간이 잇따라 파괴되거나 훼손되지만 정작 그를 애닯아하는 기관, 단체, 개인도 별로 없다. 화가 이인성이 운영하던 아루스제과점(대구 YMCA 중부지회 옆)이 얼마전에 무너지고 새건물이 들어섰으며, 청마와 영도가 사랑을 나누던 집(약전골목 끄트머리)도 불과 일이년 사이에 훼손돼 버렸다. 경상감영에서 운영하던 옥터(서문로)는 보존대책 없이 수십년째 방치되고 있고, 동학교주 최제우가 처형당한 곳에는 팻말도 없다. 탄생 1백주년을 맞는 상화시인 기념관은 대구시가 그간 고택 구입비 3억원을 만들지 못해서 수년째 공전하고 있다. 문화적인 감흥과 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문화도시 대구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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