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하는 오후

밤새 퍼부은 비로 학교 앞 샛강 넘치는 날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결석으로 처리되지 않았다

그런 날은

누나를 졸라서

사카린 물 풀어먹인

밀이나 콩 볶아

어금니 아프도록 씹으며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거나

배 깔고 엎디어 만화책을 볼 때면

눅눅하고 답답한 여름 장마도

철부지 우리에겐 즐겁기만 했고

아버지 수심에 찬 주름진 얼굴도

돌아서면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

형과 나는 은밀한 눈빛으로

내일도 모레도 계속 비가 내려

우리집만 떠내려 가지 말고

샛강 물은 줄지 않기를

낄낄거리며 속삭이곤 했다

-윤일현 '장마철-낙동강 6'

강마을 아이는 강이 키우고 산골짝 아이는 산이 키운다. 강에 영혼의 젖줄을 대고 산 높이 만큼 자신의 키를 키우며 우리들은 자라났다. 추억이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추억이 없어졌다.

하이데거는 사슴이 내려와 물을 먹지 못하는 라인강은 인간을 배제한다고 했다. 댐을 막아 공업용수로 쓰이는 낙동강에 더 이상 유년이 있을 수 없다. 죽은 강이 되었다. 우리집만 떠내려 가지 않기를 바라는 어린 그 마음이 바로 시가 되었다. 김용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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