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할아버지' 이응철(69)씨, 소문을 좇아 전화를 냈지만 틀린 번호인줄 알았다. 저 편에서 건너온 목소리는 30대 중반의 남자였기 때문이다. 마주 앉은 할아버지에게서도 고희를 목전에 둔 노인의 흔적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그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생각도, 행동도 활기로 출렁이는 '젊은이'였다.
할아버지의 작은 보이스카우트 용품점. "무슨 일로 날 찾아오셨소?" 그는 방문객이 기자라는 사실에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이응철 할아버지는 대구시 가창초등학교 우록분교의 아이들에겐 '빵 할아버지'로 통한다. 재학생뿐만 아니라 이제는 어른이 됐을 사람 중에도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을 듯 하다. 올해 초 과로로 쓰러졌을 때를 뺀다면 16년 동안 매주 이 분교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가창에 생수 뜨러 갔다가 우연히 학교엘 들렀어요. 그 예쁜 교사(校舍)에 끌려 지금껏 다니고 있지요". 할아버지의 우록분교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왕년의 교직원도 학부모도 졸업생도 아닌, 그렇다고 가창면 주민도 아닌 사람이 학교 운영위원에 위촉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매주 토요일마다 학교를 찾는다. 전교생 43명의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주기 위해서다. 토요일은 급식이 없는 날, 매일 자라는 아이들에게 할아버지가 건네는 빵은 차라리 감동에 가깝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학교로 들어서는 자신의 차를 발견하고 '빵 할아버지다!' 하고 뛰어오는 모습이 너무 좋다고 했다. 아이들은 자라서 학교를 떠나지만 그의 기쁨은 떠나지 않는다. 또 다른 작은아이들이 입학하고 그를 향해 '빵 할아버지다!'하고 고함 치며 달려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할아버지의 우록분교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졸업식 때는 작지만 장학금을 지급하고, 운동회 때는 아이들에게 운동화를 한 켤레씩 신긴다. 그 덕분에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가지는 기쁨의 꼭 두 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누리는 이 기쁨이 얼마나 남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지난 99년 50회 졸업식을 끝으로 우록초등학교는 가창초등학교 우록분교로 문패를 바꿔 달았다. 폐교 직전에 분교로 결정이 난 것만도 행운인지 모를 일이다. 교사 3명에 학생 3학급 40여명. 그나마 이 학교가 분교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마을 주민들과 이응철 할아버지를 비롯해 폐교 반대에 나섰던 사람들의 눈물겨운 투쟁 덕분이었다.
어떤 이는 자신이 경영하는 식당 종업원의 자녀를 전학시키고 숙식비와 학비를 대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진정서를 들고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관공서 근처에 얼씬도 해본 일이 없는 한 나이든 필부는 겁도 없이 교육감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기도 했다.
"또 언제 폐교 바람이 불는지 모르지요. 하지만 해볼 때까지 해 볼 작정입니다. 이 학교는 없어지면 안됩니다. 학생 수를 늘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요. 상급학교 진학 때 학군 문제만 해결하면 학생이 자연히 늘어날 텐데…. 무작정 폐교해버리면 주민들은 모교를 잃고, 아이들은 먼 거리를 버스 타고 다녀야 합니다". 이응철 할아버지는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단호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할아버지는 학교 처리 문제에는 법률이 전제돼 있음을 알고 있다. 다만 날카로운 법률로 싹둑 자르기 전에 조금 더 생각해 줄 것을 당부했다.
대구시 가창초등학교 우록 분교. 전교생이 고작 43명인 이 작은 학교는 매일 깊은 이야기를 품은 채 잠들고 깨어난다. 이곳에는 세상을 배우는 어린 영혼의 고뇌가 있고 성장의 아픔이 숨어 있다. 어른들이 법과 논리를 동원해 정확한 결단을 내리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토끼처럼 뜀박질하고 종달새처럼 노래한다. 가창면 산골 마을의 아이들은 여기에 기대어 자란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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