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헌영 세상읽기-소비에서 예술의 시대로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부르며,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웬만한 지역은 거의 예외 없이 '문화의 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거리에 나붙은 구호만 볼 때 우리는 지구상 어느 국가에 못지 않은 문화의 나라인 것 같은데 실속은 비문화적인 헛돈 쓰기 경쟁국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 시.군 단위마다 기념관, 박물관을 건립하거나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등 꽤나 부자 나라가 할 수 있는 행사가 넘쳐나지만 정작 과연 체계 있는 정책인가는 의문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 앞에 '문화'란 접두사가 붙게 된 현상, 즉 정치문화, 기업문화, 노사문화, 심지어는 시위 문화란 술어까지 등장한 것은 이제 인류가 문화예술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방증해 주는 한 예이다.

보드리야르는 포드 T형 승용차가 만들어졌던 1908년을 생산시대의 절정기로 보았다. 대량생산으로 다른 회사가 2천달러씩 받던 승용차를 290달러로 보급했던 포드 T형 승용차는 날개돋친 듯 팔려 급신장세를 보였다. 그러나 1927년 5월 포드사는 이 차 생산을 중단시키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건 GM사의 신형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T형이 인간의 운반기능을 해결해 주는 '상품'생산에 충실했다면 후자는 단순한 운반기능을 가진 기계가 아니라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소유' 욕망을 촉발하도록 만들어 전자를 압도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을 적시하면서 보드리야르는 1927년을 인류 역사에서 '생산'의 시대, 상품이 그 기능만으로 존재하던 시대가 끝나고 '소비'의 시대 곧 예술품을 창작하는 시대로 전환했다고 말한다.

소비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두껍고 따뜻한 의상 그 자체에 의하여 구매력이 좌우당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조화로운 색채인가를 중요시하기에 '옷'이 아닌 '예술품'을 찾게 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기업체는 상품을 양산할 것이 아니라 예술품을 창조해야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여기서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란 말이 나왔다. 먹을거리조차도 영양가 높은 고기로만 배를 채우기를 '욕망'하던 시대에서 우아하고 맛깔스런 예술적 분위기를 찾는 시대로 바뀌지 않았는가.

상품 생산 시대에는 과학과 자본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지만 예술품을 창작해야 되는 시대에는 기업주와 노동자의 예술적 안목과 감식력이 성패를 좌우하도록 변해 버렸다. 기업가는 적어도 문화예술을 통하여 소비자들이 원하는 미학적 취향이 어떤 유형인가를 예견하는 예지를 길러야 하며, 상품이 아닌 예술품을 생산하려는 목적의식을 가져야 하도록 세상은 변했고, 정치가도 마찬가지다.

문화예술이 21세기를 지배한다는 말은 예술도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영화나 소설이나 노래가 수출되어 외화를 벌어 들였다는 식의 단순 논리가 아니다. 모든 인간의 행위와 소비활동 자체가 문화 예술적 감식안 위에서 이뤄지며, 그러기에 욕망이 지구를 지배했던 시대엔 과학과 경제 만능주의였으나 이제는 생산과 소비 자체가 문화예술적 형태 위에서 이뤄진다는 사실 때문에 '문화예술의 시대'란 술어를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한 도시나 사회 혹은 국가가 어떤 유형의 문화를 가졌는가에 따라 소비 패턴이 정해지며 거기 따라 상품이 유통되기에 '지역문화'나 '국가문화'는 매우 중요한데, 예를 들면 외국 가요나 영화만 무성한 사회라면 외제 상품에 대한 선호도가 단연 압도할 게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문화는 외제를 숭상하는데 상품은 국산을 쓰라는 논리는 억지일 수밖에 없다.

지역문화도 마찬가지다. 중앙집권적인 문화 풍토 속에서는 모든 상품도 중앙의 것만 보급받는 걸 최고의 이상으로 삼겠지만 지방 자치제는 그 지역 고유의 토착적인 문화를 개발하여 지역 경제에 이바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건 박물관 짓기 경쟁으로 될 일이 아니라 그 정도 돈이면 보다 효과 있는 지역문화 창달에 쓰일 수 있는 방안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임헌영(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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