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어떤 회합이 대천에서 있었다. 이튿날 예상보다 일찍 회의가 끝나서 나는 차를 대절하여 국보가 넉 점이나 있는 성주사지를 돌아보고 왔다. 그래도 기차시간이 남아 가판대에서 아주 얇은 잡지 한권을 사서 보니 '아내가 사랑스러운 20가지 이유'라는 글이 있었다. 뭐 그렇게 사랑스러운 것이 많은가 싶어펼쳐보니 첫째 나의 아내는 키가 크다, 둘째 나의 아내는 예쁘다 등 등….
나는 속으로 별걸 다 사랑한다, 싱거운 사람들, 사랑한다면 전부를 사랑해야지 조목조목 따져 사랑한다면 그럼 나머지는 미워한단 말인가…. 이런생각을 하다가 나의 아내는 어떤 것이 사랑스러운가 하는 생각과 동시에 문득 어제 집을 떠나올 때가 떠올랐다. 아침에 녹차 찻잔을 받으면서 찻잔에 무엇이묻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나무랐다. 아내는 이제 시력이 나빠져서 안경을 쓰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도 나는 찻잔은 무엇보다 깨끗해야 된다고만 하였다. 30여년을 같이 살면서도 언제 눈이 나빠졌는지 또 나빠졌다는 것을 알았어도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정말로 무심코 지내왔다.
우리는 늘 가까이 있을 때는 그 존재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모른다. 아예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늘 새로운 가치를 멀리 있는 것에서 찾으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의 불행은 잉태된다. 우리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항상 상호의존적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의 애증(愛憎)은 서로의 거리에 비례한다. 왜냐하면 이 거리는 늘 이해(利害)관계에 대하여 대립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까이 있는 것끼리 행복해지려면 서로를 이해(理解)하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야한다.
좋은 예가 있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길가에 말을 매어두고 잠시 쉬는 사이 고삐 풀린 말이 밭의 곡식을 뜯어먹었다. 밭주인이 말을 붙들고 돌려주지 않자 언변이 좋은 자공이 가서 뭐라고 열심히 설명하였으나 도무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돌아온 자공은 저 농부가 무식해서 내 말을 이해를 못한다고 하였다. 그때 이름도 모르는 한 선비가 자청해서 자기가 가보겠다고 하였다. 밭주인에게 뭐라고 말을 하자 순순히 말을 돌려주었다.공자가 무어라고 했기에 그렇게 쉽게 돌려주더냐고 물으니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다만 당신이 동쪽 바닷가에 살고 내가 서쪽 산기슭에 살았다면 우리 말이 당신 밭의 곡식을 뜯어먹지 않았을 것이다'라고만 했다고 하였다.
'멀리 있는 물은 불을 끌 수 없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고 하였다. 내 발밑에 있는 돌부리에 내 발이 차이기도 하지만 내 책상위에 있는 전깃불만이 내가 책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무엇이던 가까이 있을 때 진정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타고르는 '키탄잘리(神에의 頌歌)'에서 "신(神)은 어두컴컴한성전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농부가 굳은 땅을 파는 곳에, 길을 닦는 사람이 돌을 부수는 곳에 같이 계십니다. 뙤약볕 속이거나 소나기 속이거나 늘 그들과 함께계신다"고 읊었다. 신까지도 우리와 가까이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신은 이미 신의 가치를 상실한다.
근연(近緣)이란 말이 있다. 우리가 무엇을 지극히 바라면 그 대상이 우리곁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이미어떤 인연에 의해서 결정된 필연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만남에 대하여 보다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른 모든 이웃이 결코 적이될 수 없다. 보수와 진보도 그렇다.
오늘날 우리는 정신적 자양이 너무나 메마른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삶의 가치와 참된 행복을 가까운 곳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정에서는 가족간에, 직장에서는 동료간에, 한 마을에서는 이웃간에, 한 국가에서는 서로 다른 집단사이에 그 존재의소중함을 서로가 느낄 때 행복이 그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정희돈-영남대교수·원예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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