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히로시마 원폭피해 김종태씨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주위가 암흑으로 덮였고, 운동장에서 등교하던 학생들은 온몸을 휘감는 열기에 '아츠이(뜨거워), 아츠이'를 외치며 쓰러져 마치 지옥도 같았습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투하 당시 히로시마상업학교 학생이었던 김종태(70·대구시 북구 칠성2가 신흥공업 대표)씨는 지금도 그 때의 불덩어리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한살 무렵 토목공이던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김씨는 '상인'을 꿈꾸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이 거리에 나뒹굴었고, 군인들이 화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참기름을 발라 줬다"며 당시 참상을 떠올렸다. 팔과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은 그는 이듬해 가족과 함께 국내로 돌아왔고, 51년 21살때 대구에서 주물점을 낸 뒤 50년을 낫 하나에 매달려 왔다.

날이 쉽게 굽거나, 나무자루가 헐거워지는 재래식 낫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연구와 실험을 거듭했다. 최근에는 알루미늄 고탄소강을 소재로 한 제품을 개발, 까다로운 일본시장에도 진출했고 연 10만개씩 수입주문이 쇄도하는 명품으로 소문이 났다.

그는 최근 일본의 역사왜곡과 우경화추세, 무성의한 원폭피해배상 등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13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이나, 일본 국민들이 이에 열광하는 것은 일본이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몸부림"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징용 등으로 끌려간 한국인이 아무런 죄도 없이 피폭을 당했는데도 몇 푼 되지 않는 위로금으로 배상을 무마하려 했다"며 "지난해 일본법원측이 '한국인은 한국 귀국시에도 원호법상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승소판결을 내린 뒤에도 일본검찰이 항소를 하는 등 보상을 지연하는 것은 몰염치"라고 덧붙였다. 그는 "'극일'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50년 넘게 낫을 만들어 온 것처럼 저마다 자신이 몸담은 자리에 자부심을 갖고 노력하다보면 그것이 일본을 넘어서는 길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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