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가도 많고 연구하는 학자도 흔하다. 논객은 더 많아 입 있는 사람은 모두 나선 것 같다. 그런 세월이 수십년 수백년 흘렀는데도 우리 사회는 왜 아직도 이 꼴을 하고 있을까? 어찌해서 2천년도 전에 주장됐던 왕도(王道) 사상에조차 여직 뿌리가 달리지 못하고, 여전히 패도(覇道)만 어지러울까?
얼마 전 한더위 때 20여분 걷느라 땀을 뒤집어 쓰면서 책방으로 나간 일이 있었다. 너무도 좋아해 열번쯤은 읽었고, 몇몇 후배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던 동화 같기도 한 소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또 살 일이 생긴 것이었다.
일의 발단은 어떤 분에게 돈이 필요해진 것이었다. 그 분은 버려진 간질-정신지체 장애아들을 친자식처럼 들쳐 업고 키운다고 했다. 그렇지만 막상 자신의 아들 대학 등록금은 마련치 못해 이자 비싼 빚을 얻으려 여기저기 부탁하고 있더라는 얘기가 들렸다. 가슴이 따가왔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그 분의 사랑과 공덕이 이런 식으로 되갚아져서야 되겠는가?… 형제 같이 지내던 몇 분 어른께 부탁을 드렸다. "혹시 인연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수소문이나 해 주소".
연락이 왔다. 부유해 보이지 않는 어떤 분이 마음을 내더라고.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혹시 잘못되면 어쩌나? 그 분이 과연 무상보시(無償布施)를 할 수 있을까, 그렇잖을 경우 어떻게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거절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아름다운 함께 살기
"남을 돕는다"고 자랑스러워 하며 돈 낼 사람이라면 기자는 만나 볼 생각조차 없었다. 남을 돕는 사람은 복을 받아야 할 것이고 그 복은 자기 영혼이 고양.확장되는 것일진데, 생색을 냈다간 있던 영혼마저 오히려 작아지게 되리라는 것이 기자의 변함 없는 믿음이다. 그러니 생색낼 사람에게 돈을 내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더 작게 만드는 죄 짓는 일이라고 기자는 생각하는 것이다.
소개한 어른이 "서로 명함이라도 주고 받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 분은 기자가 누구인지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명함을 보는 대신 그 분은 문득 "그 책을 어떻게 만났느냐?"고 물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명함을 산 책에 꽂아 갖고 갔던 것이나, 그건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아는 사람이 많잖은 책이었기 때문이었다.그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참으로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딴 얘기로 넘어 갔다. 점심 시간이 끝나 가는데도 그냥 재미있는 다른 얘기나 끝없이 해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등록금이 필요한 아이가 누구인지, 사정이 어떻게 나쁜지 등등은 물으려 하지도 않았다.
초조해진 필자가 먼저 설명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그 분은 "그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름답게 살기'를 최고의 가치로, '함께 살기'를 그 한 방식으로 생각한다고만 했다. 그 말로써 모든 설명을 가름한 것이었다.
아름답게 살기? 함께 살기? 기자는 또한번 놀랐다. 이런 단어를 이 분이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 말들은 기자도 만들어 신문 제작에 사용 중인 컷의 이름 '아름다운 함께 살기'였기 때문이었다. 기자 역시 아름다운 함께 살기를 최고의 사회적 가치로 믿고 있는 중이다.
그날 우리는 그걸로 그냥 헤어졌다. 기자는 "언제 한번 술 한잔 하십시다"고 인사했지만, 그 분은 다르게 말했다. "좋은 사람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그 인사야 말로 필자가 드려야 할 말이었다.
따뜻한 영혼들의 작은 소망
돌아오는 길에 기자는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눈물이 돼 쳐오르는 것을 알았다. 돈 300만원 때문만은 아니었다. 쉽게 만나기 힘든 옥인(玉人)을 오늘 내가 만났구나, 내게도 그럴 복이 있었구나! 소식을 들은 기자의 '동지'들이 그날 저녁 자주 만나는 대포집으로 모여 들었다. 기자야 엉터리이지만 그들도 참으로 옥인이다. 먼저 도착해 있던 그들은 들어서는 기자를 보고 환호성을 올렸다.
그러나 그들도 돈 준 그 분에게 감사해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존경하고 축하한다고, 그리고 좋은 인연이라고 했을 뿐이다. 줄 수 있는 영혼을 지닌 것이 큰 복이라는 뜻일 터. 그 중 한 사람은 뒤돌아 눈물을 닦았다. 나중에 물었더니, 자신에겐 그렇게 줄 돈과 줄 복이 왜 없나 싶어 섧더라고 했다. 또다른 한 분은 돈 주신 그 분에게 다음날 편지를 썼다고 했다.
하지만 필자는 여전히 그 분에게 연락을 않고 있다. 옥인은 옥인대로 가는 길이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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