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목 좋은 곳에서 그물로 먹이 잡는 거미노래
'산 입에 거미줄 치랴!' 아무리 어렵더라도 살아 있는 한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죽머의 입에 거미줄을 칠만큼 고정된 공간이 있으면 어디든 거미줄을 치는 거미의 생리에 근거하고 있다. 심지어 산 입에 거미줄을 치기도 한다.
도시락을 먹고 동료와 대학 뒷산을 오르다 보면 오솔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미줄을 만나 때로는 입에도 거미줄을 치고 코에도 거미줄을 치기 예사이다. 매일 오르내려도 여전하다.
밤새 오솔길 좌우를 가로지르며 거미줄을 치는 까닭이다.
산과 들 뿐 아니라 연구실에도 거미줄이 있다.
한참 손이 가지 않는 공간이면 어디든 거미줄을 친다.
거미의 존재는 보이지 않아도 거미줄은 여기저기 보인다. 마치 법은 보이지 않지만 법망이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자유를 옥죄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름철에는 거미줄이 특히 드세다.
거미야 거미야 왕거미야
네 줄 어따 느렸느냐
옹박골 청박골 구월령 구천리에
매활령 매천리 보령산이 느렸다
부여 사는 김희순 할머니의 거미타령이다. 거미 노래는 으레 '거미야 거미야 왕거미야'하고 시작된다. 이러한 형식은 '형님 형님 사촌형님' 또는 '사랑 사랑 내 사랑', '임아 임아 무정한 임아' 등과 같이 동일한 어휘가 두차례 반복되다가 세 번째는 꾸밈말과 함께 반복되는 민요의 일반적 양식이다. 거미 중에서도 왕거미, 형님 중에서 사촌형님처럼 세 번째 꾸밈말에서 대상이 구체화된다.거미노래의 대상은 대부분 왕거미이다.왕거미는 밤알 만한 크기를 자랑할 뿐 아니라 공중에 그물처럼 아주 넓게 거미줄을 치고는 나비와 잠자리 등 큰 곤충들까지 잡아먹는다. 다음에는 으레 '줄을 어디 쳤느냐' 하는 질문이 이어진다. 거미는 줄 위의 마술사라 할 만큼 거미줄과 뗄 수 없는 존재이다.자연히 줄을 치는 곳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그것은 마치 장사꾼들이 어디 장을 보느냐, 또는 장바닥 어디에다 좌판을 벌이느냐 하는 문제와 흡사하다.
거미줄 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물음에 대한 답은 가지가지이다. '옹박골 청박골/ 구월령 구천리에/ 매활령 매천리'라고 하는가 하면 '대웅산 대고개'라 하기도 하고 '경산두 금강산/ 뒤진개 자진개/ 돈부꽃 동질게'라고 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지리적 위치를 알리는 지명의 고유성이 아니라 지명을 일컫는 어휘들의 짝이다.
적어도 앞뒤 어휘는 둘씩 '운(韻)'이 딱딱 맞게 짝을 이루는 것이다. 말운으로 '박골'이, 두운으로는 '구'와 '매'가 되풀이된다. 다른 노래에서도 '운'이 살아있어 노래가 한층 시적이다.
아징개 자징개
동부꽃 동진개
외각도 충청도
우세도 금강도
참새를 잡어라
신안군의 박금량 할머니가 부른 노래이다.지명의 운을 섬세하게 고려한 것은 시적인 운율을 살리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아징개 자징개' 나 '외각도 충청도', '우세도 금강도' 라는 이름도 지리상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방방곡곡을 상징적으로 두루 일컫는 말이다.거미가 일정한 터를 잡아서 거미줄을 치는 목적은 거주지를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이를 잡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 노래에서는 '참새를 잡아라'고 한다. 대단한 포획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한 길 나는 저 나부야
원쟁이 좋지만은
가지가지도 앉지 마라
세상에 모진 것은
거무 우에 또 있겄나
제 발로 제 창자 내여
만단 우에 줄을 친다
오는 벌기 가는 벌기
흔적 없이도 다 잡아묵네
의령 사는 박연악 할머니 소리이다.
거미줄이 참새까지 노리고 있는 마당에, 나비처럼 연약한 곤충들은 거미줄에 한 번 걸리면 끝장이다. 몇 번 팔딱거려보지도 못하고 요지부동으로 당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원장이(울타리가) 아무리 좋게 보여도 그 가지에는 앉지 마라고 한다.
거미 같이 모진 놈에게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미를 모진 존재로 보는 것은 거미줄을 내어 그물을 치는 상황을 자세하게 관찰한 결과이다. 뱃속 실샘에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마치 자기 발로 창자를 뽑아내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자기 창자를 뽑아내어 남을 잡아먹으려는 놈이니 모질고도 독한 존재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거미야~ 거미야~ 왕거~미야~
네 줄~ 내 줄얼 어따 쳤나~
여기두 치고~ 저기두 치고~
얼~싸 동경~ 메밀땅 치고
제~주 바닥에 셈일땅 치고~
위이서~ 팔랑~ 아래서~ 팔랑~
서울서~ 내러온 금봉~채는~
가운데~ 방으루~ 모시려므나
부여 사는 김점순 할머니가 부른 노래이다.왕거미를 대상으로 한 '네 줄'은 거미줄이지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자신의 '내 줄'은 거미줄이 아니다. 그런데 내 줄을 어디다 쳤나 하고 묻고는 여기도 치고 저기도 쳤다고 한다. 동경과 제주는 거미줄을 치는 자연 공간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사회적 공간이다.
따라서 거미노래이되 거미를 대상으로 노래한 것이 아니라, 거미줄을 빌려다가 사람 사는 세상을 노래한 것이다. 서울서 내려온 금봉채를 가운데 방으로 모시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금봉채는 곧 봉황을 새긴 금비녀이니 훌륭한 뇌물이다. 여기 저기 그물을 쳐두고서 뇌물을 챙기는 셈이다. 이 노래에서 거미줄은 곧 뇌물과 이권을 챙기는 권력의 줄이자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욕망의 줄이기도 하다. 이 두 줄은 법망이라고 하는 또 다른 줄과 연결되기 일쑤이다.권력과 이권과 욕망이 법망과 만나게 되면, 참새도 영락없이 옭아매는 왕거미줄처럼 사회적인 영웅도 느닷없이 옭아매게 마련이다.
99년 대전 법조비리 사건 당시 '항명'을 이유로 부당하게 해직된 심재륜 고검장이 며칠 전 법원의 판결로 복직되어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심 고검장은 5공비리를 파헤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을 구속하는 등 '정통검사', '강골검사' 라는 정평이 나 있던 분이다. 그런데 이런 강골검사를 정부와 '정치검사'들이 나서서 법조비리를 구실로 내쫓으려 하다가 심 고검장이 정군의 시녀 노릇을 하는 검찰총장의 퇴진과 검찰 개혁을 촉구하자 항명을 구실로 면직시켰던 것이다.그러자 검찰사상 처음으로 소장검사들이 총장 퇴진을 요구하는 집단 반발까지 있었다.
그러나 집권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퇴진 요구를 받던 김태정 총장을 비리연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법무장관으로 등용하였다. 한 마디로 막 나가는 권력이다. 결국 비리가 불거져 법무장관 해임음 물론 후배 검사들에게 구속되는 사태까지 빚었다. 정권이 바른 검찰은 비리와 연루시켜 퇴진시킨 반면 비리검찰은 옹호하며 자오간으로까지 등용하는 권력의 횡포를 부린데 비하여, 법은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하던 장관을 사법처리하고 쫓겨났던 강골검찰을 복직시킴으로써 기어코 사회정의를 실현시켰다. 아직 양심적인 법관이 살아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강골검찰 심재륜도 별 수 없을 뻔했다. 그러고도 김대중 정부는 정적을 얽어 넣을 때에는 곧잘 '법대로 한다'고 들먹인다. 법망은 권력의 욕망을 챙기는 거미줄이 아니지 않는가. 아무 곳이나 줄을 치고 먹이감을 옭아매는 거미도 산 입은 피해간다.
그러나 군력이 휘두르는 법망은 가끔씩 심재륜처럼 살아 있는 입을 골라서 옭아매기도 한다. 지금 그 법망이 8.15 방북행사자들을 옭아매는 거미줄 노릇을 다시 하고 있다.
댓글 많은 뉴스
12년 간 가능했던 언어치료사 시험 불가 대법 판결…사이버대 학생들 어떡하나
[속보] 윤 대통령 "모든 게 제 불찰, 진심 어린 사과"
한동훈 "이재명 혐의 잡스럽지만, 영향 크다…생중계해야"
홍준표 "TK 행정통합 주민투표 요구…방해에 불과"
안동시민들 절박한 외침 "지역이 사라진다! 역사속으로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