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일본인들의 울릉도 착취과정을 소상하게 보여주는 조선왕조 시기의 공문서가 공개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문서는 1901년 6월 동래감리사에서 울릉도 조사기를 기록한 '남유만찬'(南遊漫纂)으로, 이종학 사운연구소장(전 독도박물관장)이 재일동포 시사월간지 '월간아리랑' 9월호에 처음 공개한 것이다.
문서를 보면 당시 약 300호가 살던 울릉도에서 불과 49호에 불과한 일본인들이 섬의 재산을 거의 독식하여 피폐하게 하는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으며, 그 상황을 '아일퇴 피일진(我日退 彼日進, 우리는 날마다 물러나고 저들은 날마다 덤벼든다는 뜻)'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본도(울릉도)의 형편을 대략 살펴보건대 조그만 섬에 당(黨)이 한둘이 아니어서 각각 기치를 세우고 각자 자기들의 소견을 주장하니, 일인당(日人黨)도 있고 회사당(會社黨)도 있으며 별도로 도민당(島民黨)도 있다. (중략) 당수(黨首) 몇 명을 경부(京部)로 압송해서 철저히 조사하지 않는다면 허다하게 저지른 못된 짓들을 타당하게 판명할 길이 없다. 그 가운데 폐단이 점점 많아지게 된 원인은 오직 일인(日人)때문이다. 하타모토(畑本)와 와키타(脇田)라고 일컬어지는 일인이 각각 한 구역씩을 나누어 차지해 해도(該島)에 있는 나무 가운데 남쪽부터 북쪽으로는 하타모토가 차지하고 동쪽부터 서쪽으로는 와키타가 차지하였다.
이들은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거침없이 가서 마치 자기 물건인 것처럼 마음대로 나무를 벤다.
그리하여 숯을 만들기도 하고 기물을 만들기도 하고 배에 실어가기도 하여 산에 가득한 나무가 숯이 아니면 기물이 되고 기물이 되지 않으면 배에 실려 가니, 만약 이러한 짓이 계속된다면 산들은 필시 벌거숭이가 되고야 말 것이다.
섬 밖으로 나가는 곡물도 우리에게 세를 납부하지 않았으며, 그 밖의 비리와 탐욕스런 일들은 한두 가지만이 아니다. (중략) 돌아보건대, 이 섬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우리 도민이 그들보다 10배나 많은데도 수적으로 많은 우리가 저들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객인 저들이 주인인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더구나 도민 가운데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자들은 모두 물러나려는 마음이 있으니, 우리는 날로 물러나고 저들은 날로 덤벼듦(我日退 彼日進)은 피할 수 없는 형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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