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집권 탈레반의 최고 지도자 물라 모하메드 오마르는 그가 지휘하는 탈레반과 마찬가지로 신화와 전설에 둘러싸여 있는 인물이다.
아프간 이슬람신도들의 사령관을 자임하는 오마르에 관한 전설 가운데 하나는그의 애꾸눈에 관한 것이다.
구 소련 침공군에 맞서 싸운 무자헤드(성스러운 이슬람 전사)는 유산탄의 파편에 맞아 부상해 본인이 직접 칼로 한쪽 눈을 드러낸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추종자들은 오마르가 눈에 상처를 입어 다른 사람들의 치료를 받았다고 말한다.
이에 관한한 어떤 것이 신화이고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마르가탈레반 치하의 아프간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만은 움직일 수 없는사실이다.
올해 41세의 성직자인 오마르는 윤곽이 뚜렷하고 검은 수염을 더부룩하게 기른얼굴에 말수가 적고 키가 큰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아프간인이 아닌 사람과만나는 일이 드물고 비(非)무슬림과는 거의 대면하지 않는다.
오마르를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을 적게 하고 이슬람 신앙이 확고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의 이슬람 교리 해석은 완고하고 융통성이 없어 반대론자들은 물론 측근들도 그의 이러한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한다.
오마르의 세 부인 가운데 한 부인의 삼촌인 니다 모하메드에 따르면, 그는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오랜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모하메드가 방문했을 당시 그의 방에는 가구가 거의 없었고, 아이들은 뛰놀거나 그의무릎에 앉아 있었다. 그의 자녀는 5남1녀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자신을 '아미르-울-모미닌(이슬람신도들의 사령관)'으로 선언한 그는 고향인 싱헤사르 마을의 한 이슬람사원에서 봉급쟁이 설교자로 이슬람 성직생활을 시작해 1979년 구 소련이 아프간 좌파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손에서 코란을 놓고 총을 잡았다.
싱헤사르 인근의 칸다하르시에 진주한 구 소련군이 완강하게 저항하는 그곳의파탄족을 진압하려 하자 오마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슬람 종교 학생이라는 뜻을 가진 '탈레반'을 조직했다. 오마르와 탈레반 조직원의 대부분은 파탄족이다.
1989년 2월 구 소련군이 철수한 후 오마르는 사원으로 복귀했으나 침공군을 몰아낸 이슬람 반군 지휘자들은 각자 남부 칸다하르에 할거하면서, 유엔 구호품을 포함해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금품을 훔치거나 강탈하는 짓을 일삼았다.
'전설'에 따르면, 오마르는 1994년 어느날 밤 꿈에서 칸다하르 지역을 공포의도가니로 만들고 있는 군벌들에 맞서 반기를 들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
그해 파키스탄이 새로운 무역 루트 개척을 위해 중앙아시아로 보내는 물자를 싣고 가던 트럭 행렬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약탈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의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총리 등 정부 고위인사들이 칸다하르를 방문해 오마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마르가 약탈당했던 물자를 되찾는데 도움을 줌으로써 그와 탈레반에 대한 파키스탄의 지원이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탈레반이 파키스탄의 '작품'이라는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무기를 개량하고 칸다하르로 신속하게 이동해그 지역 군벌들의 무장을 해제한 데 이어 수개월 만에 서부지역을 휩쓴 다음 전 공산주의 게릴라 이스마일 칸의 지배하에 있던 헤라트로 진격해 칸의 이란 도주로 헤라트에 무혈입성했다.
탈레반은 이후 전국 장악을 위한 진격은 개시, 파죽지세로 수도 카불까지 쳐들어가 1996년 9월 부르하누딘 라바니 대통령과 아흐메드 샤 마수드 국방장관을 카불에서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공식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오마르는 정권 장악 이후 지금까지 3차례 밖에카불에 가지 않았고, 그것도 잠깐 체류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탈레반군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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