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슬람 국내전교 50년 교도 10만여명 달해

미국 대테러 참사의 배경과 배후로 이슬람권이 겨냥되면서 국내에서도 이슬람교에 대한 관심이 높다.

국내에서는 1976년 서울의 이슬람 사원의 개원으로 서서히 각 지방에서의 선교가 활기를 띠는 상황. 가정집, 비닐 하우스 등에 임시 예배실을 마련하고 이슬람을 알리는 노력은 지방에서의 이슬람 사원 건립을 유도했지만 대구에는 아직 건립된 사원이 없다.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이주화 사무처장은 "대구 성서공단 등지에서 주로 3D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파키스탄인 등 아랍계 근로자들중 몇몇이 부산쪽으로 가 예배를 드리고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고 했다.사실 전통적으로 평일 하루 5번씩 예배를 드리고, 금요일 오후 1시 합동예배를 갖는 이슬람 예배 방식은 직장인 이슬람교도가 사원에 직접 가 참석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자기들이 거주하는 방에다 임시예배실을 마련해 식을 진행하는 방식이 대다수.

외국 무슬림의 지원으로 서울 사원에 이어 1980년 9월 부산 이슬람 사원이 남산동 두실에 개원했고, 81년 7월에는 경기도 광주에서, 86년 11월 전북 전주에 이슬람 사원이 개원됐다. 한국인으로서 86년 4월에 안양의 한 한국인 무슬림이 기독교 교회를 매입하여 이슬람 사원으로 개원한 것이 효시. 현재는 울산과 제주에도 임시 예배실이 설치된 상태 .

오늘날 한국 무슬림 공동체의 형성에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은 1950년 한국 전쟁에 무슬림 군인들이 참전하면서.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다국적 군내에는 이슬람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터키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여단 병력을 파견하였다. 최초의 한국인을 상대로 선교를 시도한 사람은 당시 제 6터키 여단의 한 군인이었다. 이어 55년 9월 15일 서울에서 신도 70여명이 참여, 한국에서는 최초로 '한국 이슬람 협회'가 발족돼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이슬람교를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듬해 1956년 4월에 문을연 동 협회 산하 '청진학원'은 중학교에 진입하지 못한 불우한 청소년을 대상으로 무료로 중등교육과 이슬람 교리교육을 실시했고 80여명의 학생들 중 일부가 이슬람에 귀의했다.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한국 이슬람 근대사에 최초의 이슬람 사원으로 기록될 임시 사원이 서울 이문동에 막사의 형태로 나마 미나렛(예배 시간이 왔음을 알리는 목적으로 세우는 이슬람 사원에 붙어있는 일종의 첨탑)까지 구비해 마련됐고, 그 당시의 입교자 수는 208명에 이르렀다.

이후 1965년 4월에는 오늘날 한국 무슬림 공동체 기구가 되어있는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의 모태가 되는 '한국 이슬람 중앙 연합회'가 공식 출범했다. 이 연합회는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임시 사원과 사무실을 마련, 국내에서의 이슬람 선교와 해외의 이슬람 단체들과 교류를 위해 힘썼으며, 1967년 3월 문공부로부터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의 설립을 인가받아 한국 무슬림을 대표하는 공식적인 기구로서 법적 지위를 얻었다.국내에서의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것과 비례, 70년 당시 한국 무슬림들에게는 필연적 사업이었던 사원건립이 현실화돼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1천500평 규모의 사원건립 부지가 확보됐고 76년 5월 사원 개원식이 거행돼 한국에서는 최초로 아랍 건축양식에 의한 돔식 이슬람 사원이 건립된다.

이어 한국 무슬림들의 수도 급증하여 개원 전 약 3천700명에서 개원 후 3년 내에 1만 5천명이 되었다. 이주화 처장은 "약 10만명의 무슬림이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고 전한다.

배홍락기자 bhr222@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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