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짙게 깔린 그늘 빈곤 자살

4년 전 이맘때. 그때 벌써 암울한 그림자가 우리나라를 덮었었다. 그래서 예고된 추석은 '검은 한가위'. 그리고 IMF사태가 닥쳤었다.

그렇게 시작됐던 실직.빈곤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지금도 줄을 잇고 있다. 그 사이 요란했던 구호는 세계화. 사회 보장 장치는 되레 뒷걸음질 치는 듯 한데 실업만 앞장서서 세계화 된 것일까? 빈곤 자살도 덩달아 상시화되는 것일까◇전국 최고의 자살률=경북은 자살률에서 전국 최고이다. 1999년 612명, 지난해 630명, 올해도 8월까지 35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교통사고가 무섭다지만 자살자도 교통사고 희생자(작년 1천331명)의 절반에 이르는 것.

자살자의 절대 숫자는 서울.경기.경북 순이나 총인구를 감안하면 실제 자살은 경북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고 있다. 1999년 서울은 9천800여명 중 1명, 경기는 7천900여명 중 1명이 자살했지만, 경북에선 4천600여명 중 1명 꼴이다.

자살자는 갈수록 증가하고, 게다가 절망과 자학으로 인한 '간접성 자살자'까지 합치면 숫자는 또 훨씬 늘어난다.

◇실직, 빈곤, 가정불화 그리고 자살=특히 주목할 것은 사회.경제 구조적인 결과로 빚어지는 자살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IMF사태 이후 실업문제가 상시화된 뒤 그것이 빈곤과 가정 불화로 악화돼 결국엔 절망과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 경북지역 작년 자살자 630명 중에는 남자가 449명으로 여자(181명)보다 훨씬 많았던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경산에서는 이런 자살자로 명확히 드러난 경우만도 1998년 5명, 작년 4명이었고, 올들어서도 이미 4명이 나왔다. 의성에선 1997년부터 매년 4건, 6건, 10건, 8건의 빈곤 자살이 있어 왔으며, 올해도 벌써 6명이 삶을 정리했다. 1997년과 98년엔 한 건도 없었던 울릉에서도 1999년 2명, 작년 1명, 올해 1명 등 빈곤으로 인한 자살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실직이 준 절망들=건설 일용공으로 성실하게 일하던 박모(38.포항)씨는 1998년 이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게 된 뒤 결혼의 꿈이 무너진 것은 물론 생계조차 어렵자 지난 3월 여관에서 삶을 정리했다. 그는 유서에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썼다. 이모(35.경주)씨는 IMF 이후 실직한 뒤 몇년 째 일자리를 못구하자 지난 2월 "불효자를 용서해 달라"는 유서를 남겼다.

운전기사였던 임모(40.경산)씨는 사고를 낸 뒤 일자리를 잃어 집안을 일으키려던 꿈이 사그라지자 최근 인생을 정리했고, 하모(35.포항)씨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전전하다 지난 2월 소백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모(24.문경)씨는 자신이 다니던 구미의 회사로 전화했다가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답변이 돌아오자 실직이라 직감하고 지난 11일 극약을 마셨다. 안동에서는 실직 후 공공근로 대상에서조차 탈락하자 50대 후반의 중년이 낙심했고, 다섯 동생을 뒷바라지 하다 건설경기 침체로 일용 노동일까지 얻지 못하게 된 박모(36)씨도 절망 속에서 삶을 접었다.

◇무너지는 사업=김모(칠곡)씨는 사업이 안된다며 술이 잦아진 뒤 부인이 가출해 버리자 자녀 둘에게 유서를 남기고 절에 가 불공까지 드린 뒤 작년 8월 목숨을 끊었다. 김모(36.경주) 여인은 통닭집을 해도 빚만 늘자 지난 4월 삶을 포기했다.김모(39.포항)씨는 가구점 사업이 힘들자 작년 11월 네 가족이 함께 세상을 버렸으며, 어느 여고생은 사업 실패 후 아버지가 자살하자 "제가 괴로울 때는 아버지가 가까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힘들 때는 제가 멀리 있었습니다"는 편지를 썼다. 이모(39.군위)씨는 종업원이 20명이나 되던 자신의 회사가 부도난 뒤 부모 산소를 찾아 삶을 마쳤다.

◇갈수록 더 가난해지고=강모(57.의성)씨는 정부 생활보조금을 받아 살다가 지난 6월 비관자살했으며, 김모(38.영주)씨는 포장마차 살 돈 300만원을 구할 수 없자 부모 산소 앞에서 음독했다. 안모(31.여.영주)씨는 살기가 힘들어 불화를 겪다 택시기사였던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취직한다며 상경한 뒤 살기를 포기했다. 장모(39.울릉)씨는 육지에서 인부 생활을 하다 실직하고 귀향한 뒤 아내마저 떠나자 술로 세월을 보내다 지난달 8월 최후의 결심을 했다.

전모(30.의성)씨는 빚은 산더미 같은데 봄가뭄으로 마늘마저 타 들어가자 비슷한 시기에 삶을 포기했고, 권모(48.경산)씨는 참외 값이 떨어져 빚만 늘자 지난 2월 자신의 비닐하우스에서 음독했다.

◇간접성 빈곤 자살들=또 자살로 직결되지는 않았더라도 절망으로 인한 알코올 중독사 등 간접성 자살도 적잖아, 넓은 의미로 자살의 범주에 드는 경우는 훨씬 많을 것으로 경찰은 판단하고 있다.

개인 사업을 하다 IMF 폭탄에 도산했던 김모(55.포항)씨는 가정까지 부서지자 술에 의존해 살다가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노동으로 근근이 모았던 1천만원을 빌려 줬다가 떼인 강모(38.상주)씨는 지난 1월 절망해 삶을 포기했다.

이모(82.영천) 할아버지 부부는 도시 자녀들이 어려워져 생활비 보조까지 줄어들자 지난 4월 함께 세상을 하직했으며 이모(70.상주) 노인은 아들이 어려워졌다는 소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옷가게 하던 서울 아들의 부도로 생활비 지원이 끊긴 구미의 70대 할아버지, 건축업을 하며 생활비를 보내 주던 아들이 사업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모(73) 할머니는 결국 죽음을 택했다.

사회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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