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초군들의 풀베는 소리
일꾼들의 여름일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풀베기이다. 풀이 가장 무성한 7, 8월이 되면 더위를 피해서 식전아침에 한 짐, 해거름에 한 짐씩 풀을 베어다가 작두로 썰어 거름더미 가까운 담벼락에다 높이 쌓는다. 그러고서 온 겨우내 외양간에다 마른 풀을 넣어서 소의 마른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소가 오줌똥을 싸서 밟아내면 이를 두엄에 넣어 거름을 장만한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농가에는 두엄더미 외에 세 가지 더미가 높이 쌓여 있다. 하나는 나뭇더미이고, 둘은 풀더미이며, 셋은 짚더미이다. 짚더미는 지난 여름 농사지은 생산의 결과이며 나뭇더미는 땔감의 넉넉한 저장이지만, 풀더미는 다음해 농사를 위한 거름의 확보라는 점에서 가장 든든한 미래의 전망이기도 하다. 요즘 우리에게 우뚝한 풀더미처럼 미래를 담보할 미더운 전망이 있는가. 더러 다른 더미는 보이지만 내년 농사를 대비한 풀더미는 눈에 띄지 않는다. 미래의 전망이 어둡다는 말이다. 풀베기 소리부터 들어보자. 마구마구 갈가마귀야
지리진산 갈가마귀야
가거라 날 다려 가거라 날 다려 가거라
지리진산 갈가마귀야 날 다려 가거라
성주 김상태 어른의 풀베기 소리이다. 마치 나무꾼들의 어사용이나 갈가마귀 소리와 흡사하다. 산에 올라가서 풀을 베어 지게로 져 나른다는 점에서 나무하는 일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풀베기는 한창 더운 여름철에 할 뿐 아니라 일일이 낫으로 풀을 베어야 하기 때문에 나무하는 일보다 더 힘든다. 갈가마귀에게 '날 다려 가거라!' 하며 몇 번이고 숨가쁘게거듭 외치는 소리는 그러한 일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심정을 잘 드러낸 셈이다. 허리 굽고 나이 많으니
섧은 생각이 절로 난다
곰곰이 생각을 하니
흐르난 것이 눈물이라
눈물 모아 한강수 되고
한숨 모아서 동남풍 된다
성주 오달근 할아버지 소리이다. 풀베기는 주로 청년들이 담당하는데 처지가 딱한 노인들은 마을 젊은이들과 함께 풀 베러 나서야 하거나, 이들 초군들에게 끼지도 못한 채 외톨박이로 혼자 풀을 베야 한다. 그러니 더욱 섧은 생각이 들고, 이런저런 형편을 생각하면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한강수를 이루며, 한숨도 절로 나와 동남풍이라 되는 듯 거세다. 젊은이들처럼 갈가마귀에게 날 데려 가라고 아우성을 칠 형편도 되지 못한다. 눈물과 한숨이 고작이다.세상이 비관키는
머리나 깎고 중이 될까
가사장삼 떨쳐나 입고
명산대철을 찾아갈까
비감한 정서가 확산되면 마침내 속세를 떠나고 싶다. 풀베기를 하면서 선조들의 무덤 벌초도 곁들어 하게 되는데, 이때 풀을 베면서 떠오른 생각이 머리를 깎고 중이나 되어보면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중이 수도하며 고행하는 수도자인 줄은 모르고 가사장삼 떨쳐입고 명산대찰이나 찾아다니는 한량 정도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풀 베는 일꾼들에게 절이나한가롭게 찾아다니는 중이 선망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춥냐 덥냐 내 품에 들거라 아하아
벨 것이 없~걸랑 내 팔을 베어라
얼씨구나 가가시는 곳에 네가 얼마나 갈소냐
남원 사는 노영현 할아버지 소리이다. 젊은 초군들의 노래에는 신명이 뻗친다. 같은 풀을 베더라도 늙은 초군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절박한 상황을 연상하는데, 젊은 초군들은분내 나는 색시가 자기 팔을 베고 품에 안겨드는 달콤한 상황을 노래한다. '머리 깎고 중 되기'와 '팔 베고 색시 품기'는 전혀 딴 세상 같은 이야기이지만 풀베기를 두고서 보면 충분히가능한 이야기이기이다. '풀베기'를 곧 '팔 베기'로 연상한 것이다. 처지에 따라서 시적 상상력의 차이가 엄청나다. 초군들아 초군들아
아기초군 청년초군
소 믹이는 소친구들은
이 잔등이 저 잔등이 소 간가 보고
풀 비이는 청년들은
어서 비고 많이 비서
많이 빈 사람 기 꼽아주고
작게 빈 사람 송장을 묶으네
고흥 사는 정영엽 할머니 소리이다. 마치 두레풀을 베어 본 듯이 노래해서 주목된다. 초군들이 공동으로 풀베기를 하는데, 소도 몰고 가서 풀을 뜯어먹인다. 아기 초군들은 소풀을 베고 소도 먹이지만 청년 초군들은 다투어 풀을 벤다. 일종의 풀베기 대회인 셈이다. 풀베기 두레 조직에는 대장 노릇을 하는 '소메기장수'와 역원들인 '외염치기', '간세' 등이 있어 엄격한 통제 아래에서 풀을 벤다. 가장 많이 벤 초군에게는 네모난 깃발을 지게에다 꽂아주지만, 가장 적게 빈 초군에게는 벤 풀을 송장처럼 길게 묶어서 가로로 지게 위에 얹어 일 솜씨 수준을 널리 알린다.
해는 지고/ 저문 날에
조심 조심이/ 집이를 갑시다
부모도 만나고/ 처자도 만나서
윗임도 윗고/ 뻣뻣한 보리밥
마주 앉아서/ 달게 달게
먹어나 봅시다
고양군의 장경덕 할아버지가 부른 '풀등짐 소리'이다. 초군들이 풀짐을 잔뜩 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따라서 '위야 허허'라는 뒷소리에 맞추어 가볍게2음보로 부른다. 저문 날에 발길을 조심하라는 당부가 거듭된다. "짚은 디는/ 살팡 딛고/ 높은 디는/ 힘차게 디뎌도/ 저문 날에/ 조심을 합시다"고 발 딛는 방법까지 일깨워준다.
풀짐을 지고 집에 가면 부모처자를 만난다는 기쁨으로 가슴 설렌다. 지금은 가파른 산길에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무거운 풀짐을 힘겹게 지고 다리를 후둘후둘 떨면서 조심조심오솔길을 내려가지만, 집에 가기만 하면 부모도 만나고 처자도 만나서 웃음도 웃을 뿐 아니라, 거칠은 보리밥이나마 가족들끼리 마주 앉아서 달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이르면 읽는이도 콧등이 찡해 오리라. 예사 사람들의 이러한 꿈이야말로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될 진정한 행복이 아닌가. 지금 세계는 예사 사람들의 소박한 꿈과 행복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테러집단의 공격과 이에 대한 미국의 보복 전쟁이 엄청난 살상을 불러일으킬 조짐이다. 테러집단과 미국의부시정권은 무고한 시민들의 대규모 살상을 통해 보복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 더군다나 테러집단과 부시정권은 서로 상대방을 돕는 나라들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으름장을 놓는 짓거리조차 꼭 같다. 테러집단의 미국공격도 보복행위이고 이에 대한 미국의 전쟁 또한 보복행위라는 점에서 어느 쪽이 더 도덕적이라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미국은 보복공격을 전쟁 차원으로 확대하고 온 세계를 끌어들여 장기전을 펼 작정이다. 그런다고 무너진 펜타곤이 복원되고 파괴된 무역센터가 재건되지 않는 것은 물론, 무고하게 죽은 시민 한 사람도 살려내지 못한다. 살려내기는커녕 보복전쟁이 가혹할수록 쌍방간의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만 더욱 커질 뿐 아니라, 피해자들의 원한과 증오는 더욱깊어지고 복수심도 더욱 들끓게 마련이다. 결국 테러의 발본색원은커녕 테러의 화근을 더욱 키울 따름이다. 그러므로 미국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 테러범을 체포하여 법정에 세우고 법에 따라 사법 처리하는 것이 테러에 대한 합법적 응징이자 진정한 승리라는 사실을 깨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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