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특별기고-판소리 퇴계와 유교문화축제

"언젠가 퇴계 선생 판소리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만, 이것이 오늘 마침 현실로 이루어지니 꿈만 같습니다". 도산서원에서 지난 주말에 공연된 판소리 퇴계선생전 '금성옥진(金聲玉振)'을 참관한 퇴계 종손 이근필 어른이 방송 인터뷰에서 밝힌 감격적 소회이다. 세계유교문화축제의 일환으로 퇴계의 '도산 12곡'에 곡을 붙인 창작국악 연주회와 함께 창작판소리 퇴계선생전도 발표된 것이다. 홀어머니의 정성에서부터 학문에 정진하는 퇴계, 벼슬길의 퇴계, 어머니의 죽음과 귀향, 어사 시절의 행적, 풍기군수 활동, 도산서당 생활, 율곡과 만남, 성학십도의 완성, 그리고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생애사 속에 갈무리되어 있는 퇴계의 삶과 사상을, 우리 시대의 명창 안숙선씨의 득음으로 도산서원 앞마당에 구성지게 풀어놓은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남창이었으면 더 좋았으리라 생각하지만, 판소리 창작이 완성되어 CD를 통해 널리 보급되면 누구든지 이 소리를 감상하고 익힐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명창들도 퇴계 판소리를 자기 신명으로 부를 수 있는 터전을 사실상 마련하게 된 터라, 굳이 여창이라 하여 섭섭해 할 일이 조금도 없다. 일찍이 판소리 이순신과 판소리 유관순 등 우리나라 위인들은 물론, 판소리 예수까지 창작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지만 퇴계만은 그 대상에서 한참 비켜나 있었다. 지난 92년 12월의 문화인물로 퇴계가 선정되었을 때 국립관현악단의 기념공연에 곁들어 소리꾼 이일구씨가 4분 남짓 판소리 퇴계 소품을 발표한 적이 있으나 아쉽기 짝이 없었다. 적어도 한두 시간은 불러야 판소리 예수만은 못해도 어느 정도 퇴계의 삶과 뜻을 담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번 유교문화축제를 계기로 한 시간 분량의 판소리 퇴계가 발표되니 이근필 어른의 말씀처럼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감회를 누르기 어렵다.

판소리 퇴계와 도산12곡 창작발표회를 지켜보면서 안동에서 내달 5일부터 시작되는 세계유교문화축제의 가능성에 자연스레 기대를 모으게 된다. 그 동안 전통예술과 문화 관련 축제들이 기존의 역사적 유물이나 문화재로 지정된 작품들을 두루 끌어 모아 보여주고 다시 흩어버리는 수준에서 만족한 나머지, 상당한 예산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축제를 마치고 나면 문화적으로 새롭게 창출되거나 작품이 생산되기는커녕 아무것도 남는 게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쓰레기만 남았다고 할 정도이다. 그런데 이번 유교문화축제는 사전행사부터 우리 소리사와 예술사에 남을 창작 판소리와 창작 국악이 발표되어 문화계의 이목을 끌 뿐 아니라 앞으로 선보일 축제의 내용들까지 밝은 전망을 예고하는 조짐으로 읽힌다.

전통 궁중정재의 하나로 고고한 선비의 몸놀림과 지조를 상징하는 '학연화대 합설무'나 궁중 연회에서 추던 '태평무'의 공연도 장엄하고, 공자 고향에서 온 곡부예술단과 산동성예술단의 공자 관련 퍼포먼스 또한 유교예술의 진수를 보여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문화재적 가치와 국제적 평가를 받고 있는 대단한 공연물보다, 이 축제를 계기로 새롭게 창작되고 생산되어 처음으로 선을 뵈게 되는 판소리 퇴계처럼, 극단 성좌의 창작극 '퇴계선생 상소문'과 국립국악단의 창작무용 '성현들의 가르침 영원히' 등 창작 문예작품에 더 큰 기대를 건다. 이런 작품들은 어느 것이나 이 축제를 계기로 새롭게 태어나 우리 문화유산을 더 풍부하게 살찌우고 우리 예술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보태는 문화창조의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정작 우려되는 것은 '판소리 퇴계는 안 된다' '이런 용어는 퇴계 선생이 쓴 말이 아니다'하면서 유교문화의 형식만 경직되게 감싸고 인간 퇴계의 삶을 성역화한 채 그 알량한 학문 수준으로 유가의 말마디나 우려먹으면서 유학자인 양 행세하려는 유교주의자들의 입김과 개입이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의 보수적 논리나 동어반복의 퇴행성을 극복해야 새로운 패러다임의 퇴계학이 가능하고 생산적인 문화축제를 꾸릴 수 있다는 모험적 발상이 긴요하다. 우리 화폐를 장식하는 인물이 퇴계와 율곡 같은 철학자라는 사실에 한국의 가능성을 읽는 눈이 필요하고, 일본에는 철학사가 없어도 우리나라에는 철학사가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는 학문적 식견이나마 갖출 때이다. 유교문화의 창조적 계승은 공자를 섬기는 의례활동이 아니라 한국철학과 민족문화의 전통에 입각한 이 시대의 우리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 가능성이 유교문화축제 사전행사에서 벌써 눈에 띄니 반갑지 아니한가. 임재해(안동대 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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