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후삼국 최대의 격전, 공산 전투 재연

팔공산에서 1천여년 전의 역사적 숨결이 되살아난다. 대구 팔공문화원이 공산전투를 재연하는 '2001 팔공고려문화제전'을 12일부터 펼치는데 이어, KBS 대하 드라마 '태조 왕건'의 무대 또한 이번 주말부터 팔공산으로 옮겨온다.

후삼국시대인 927년 9월에 있었던 공산전투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침공한 후백제군과 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고려군이 대구의 팔공산 일대에서 벌인 건곤일척의 대전투.

팔공문화원의 고려문화제전과 TV 드라마의 공산전투에 맞춰 팔공산이 후삼국의 격전지가 된 배경과 전투과정 그리고 고려군의 패배와 왕건의 도주로를 추적하며 공산전투의 역사적인 의미를 되짚어본다.

팔공산과 대구지역 일대에 숱한 지명과 설화를 낳았던 공산전투 시리즈는 대구를 둘러싼 후삼국의 역학관계와 대구의 역사적인 존재양태를 재조망해 보는 의의를 가질 것이다.

공산전투의 서막= 왜 팔공산이었는가

공산전투 제1차 격돌= 고려군의 공격과 퇴각

공산전투 제2차 격돌= 고려군의 참담한 패배

공산전투의 결말= 태조 왕건의 도주행각

후삼국의 두 영웅 왕건과 견훤은 대구 팔공산에서 운명을 건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왜 대구의 공산지역이 전장터로 선택됐을까. 후백제군에 짓밟힌 경주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왕건은 왜 공산으로 이동했으며, 견훤은 경주를 함락하고 돌아가는 길을 왜 굳이 이곳으로 잡았을까. 공산전투의 이해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먼저 삼국사기 견훤전에 따르면 견훤이 공산으로 가는 과정을 '자수의귀'(自隧以歸)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되돌아 갔다'는 뜻으로 공산지역이 후백제군의 퇴로였음을 암시한다. 또 이곳이 영천을 공략한 다음 경주를 침공하는 거점구실을 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TV 드라마에서 보았듯 후백제군이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지역)에 대한 집요한 공격으로 합천과 창원지역을 확보, 경상북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면서 얻은 결과이다.

견훤은 따라서 합천~고령~대구~군위로 이어지는 경상도의 중앙로를 세력권으로 장악했을 공산이 크다. 이 가설은 924년 후백제가 대야성과 문소성(聞韶城.경북 의성지역)의 군사로 조물성(曹物城.김천 조마면 또는 안동부근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을 공격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뒷받침하고 있다. 합천에서 군위에 이르는 연결선 확보 없이는 불가능한 군사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주.상주.문경 등 서쪽방면과 진보.영천 등 동쪽 방면 그리고 안동 이북지역과는 달리 고령.대구.군위.의성으로 이어지는 중앙지역은 고려에 귀부한 기록을 찾아볼수 없는 것도 그렇다.

이것은 당시 대구지역이 후백제의 세력권 아래에 있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경상도 지역의 확보와 신라의 복속은 후삼국 통일의 승패를 가늠하는 관건이었다. 대야성을 잃어버린데다 여러 성주들의 고려 귀부가 잇따르자 경상도 지역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견훤의 대규모의 군사적 행동이 경주침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를 결코 간과할 수 없었던 고려군이 후백제의 세력권이었던 대구를 우회한 공산지역을 거쳐 영천으로 향하다 견훤의 군사와 국운을 건 혈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도움말:류영철(영남대 강사).팔공문화원.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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