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기홍 칼럼-어설픈 전문가의 함정

직업이 경제학 교수이다 보니 경제 문제에 대한 즉석 자문을 요청받을 때가 자주 있다. 경제학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못할 바도 없다. 세계 경제의 흐름이나 한국 경제에 대한 일반적 이야기도 그럭저럭 얼버무릴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지역 경제의 구체적 문제에 이르면 정말이지 자신이 없을 때가 많다. 그것도 조사는커녕 잠깐 생각을 정리할 여유도 없이 즉답을 요구하는 데는 참으로 곤혹스럽다. 경제학 교수가 그것도 모르느냐는 투다. 거절하기 곤란해서 몇마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 나면 영 찜찜하다. 이렇듯 본의아니게 영락없는 반쪽짜리어설픈 경제 전문가 노릇을 할 때가 많다.

어설픈 전문가의 등장은 비단 어느 개인에 국한된 문제도 아니요, 또한 어느 특정 분야에 국한된 문제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전문가 빈곤 현상이 낳은 일반적 결과다. 철저한 이론 무장과 함께 구체적 실무 경험까지를 두루 갖춘 제대로된 전문가가 턱없이 부족한 까닭에 짧은 원론적 지식만으로 전문가 행세를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런 어설픈 전문가들은 현실로부터 이론을 구축하기 보다는 자신이 아는 이론에 현실을 짜맞추려 하기 마련이다. 제 아는 것에만 의존하다 보면 자신의 짧은 지식이 곧장 편협한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기 십상이다.이 이데올로기가 현실과 배치되는 경우 오히려 바로 그 현실이 잘못된 것인 양 강변하게 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한국 경제는 경제학자들이 망치고, 한국 교육은 교육학자들이 망친다'는 말이 나온다. 어설픈 전문가들이 특히 이 두 분야에서 구체적인 정책 입안 과정에 너무 깊숙이 관여한 나머지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공론식 정책이 양산되어 온 현상을 빗댄 말이다. 요즘 들어 이런 우려를 낳게 하는 분야가 또 하나 더 늘었다. 바로 복지정책 분야다. 복지정책이야말로 어느 분야보다도 현장 중심의 '눈높이 복지'가 실현되어야 할 정책 분야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하지 못하다. 복지전문가들의 어설픈 전문성이 구호 중심의 복지정책들을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의 구호가 먹혀들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 된 현실 탓으로 돌려진다.

의약분업 사태, 생산적 복지 등 그 예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장애인 복지정책의 새로운 핵심 개념인 '탈시설화'만 해도 그렇다. 분명 옳은 말이긴 하다. 장애인들을 격리·수용하는 데 급급하지 말고 재활과 자활을 통해 지역사회에 통합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원론에야 누가 반대할 수 있겠는가. 전문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그 정도는 쉽게 주장할 수 있다.문제는 재활과 자활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중증 장애인들이 이로인해 오히려 복지 수혜의 사각지대에 내몰리게 된다는 점이다. 더이상 가정에 머무를 수 없는 장애인들을 위한 생활시설의 신축이 올해 전국적으로 겨우 두 곳에 불과하다. 경직적인 탈시설화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사후 자녀들에게 닥칠 비참한 운명에의 예감으로 피를 말리는 중증 장애인 부모들이 아직도 부지기수인 현실을 무시한 어설픈 복지전문가들의 이데올로기적 무책임이 낳은 결과다.

어설픈 전문가보다는 차라리 건강한 비전문가의 경험에 입각한 상식적 판단이 옳을 때가 많다. 제대로된 전문가라면 아마도 그들의 판단 역시 이러한 건강한 상식적 판단과 크게다르지 않을 것이다. 언제쯤 우리 사회도 어설픈 전문가들의 함정에 빠지는 일 없이 각 분야마다 제대로된 전문가들을 갖추게 될 것인지? 언제쯤이면 우리도 정책 실패로 인한 애꿎은 피해에속끓이는 일 없이 그들을 믿고 살 수 있을 것인지? 이런 한심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걸 보면 아직 우리 나라는 기본이 덜 된 나라임에 틀림없는 모양이다.

권기홍(영남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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