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교실밖의 넓은 세상-고교 영상동아리 '우리세상'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이야기 했듯 '386세대'가 헐리우드 영화와 함께 성장해 왔다면, 2000년대의 10대들은 한국 영화의 홍수 속에 자라고 있다. 서울에서는 이미 10대들이 독립영화를 제작한다고들 시끌시끌할 정도.

지역에서는 어떨까? 청소년들이 자주 찾는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무비 키즈'(movie kids)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헐리우드 키드'의 인터넷 판인가? 이들은 인터넷 다음 카페(cafe.daum.net/moviekids)에서 만날 수 있었고, 카페 홈의 배너에는 '대구 청소년 영상 제작단'이란 이름이 보였다. 그리고 그 카페에는 영화와 그들만의 모임에 대한 왁자지껄한 수다와 비평, 회원만이 볼 수 있다는 비밀스런 창작 시나리오, 영화제작 일지 등이 빽빽히 자리하고 있었다.

내친 김에 그들이 모인다는 대구 봉산동 청소년 문화센터 '우리세상'을 찾았다. 지난 14일 오후 4시. 교복을 입고도 여학생과 함께 어른 영화를 의기양양하게 관람하던, 조금은 삐딱한 '헐리우드 키드'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왔다갔다 하는 10대들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겨우 눈이 닿은 곳은 한쪽 구석. 평범해 보이는 학생 10여명이 떠들썩하니 모여 있었다. 그들이었다. 조금은 실망스런 표정을 감추고 뒷전에서 얘기를 들어봤다. "밀리오레 야외무대는 제가 맡을께요. 그 다음에 국채보상공원으로 가면 되죠?" "저는 국채보상공원에서 계속 찍으면 되는군요" "토요일엔 요즘 고민에 빠진 친구와 바다에 가기로 했어요. 일요일엔 뭐든 다 할께요"… 내용이 심상찮아 보였다. 오는 27, 28일 열리는 대구 청소년 문화 한마당 촬영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지난달 16일 시작된 예선부터 수백개 중고생 팀이 참가한 수십개 행사 영상 기록을 이들 10여명이 맡는다는 얘기였다. 탁자 위엔 8㎜ 디지털 캠코더 하나만 달랑 보였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했다.

모임이 끝나고 인터뷰를 시작하자 인터넷에 비쳤던 예의 수다가 쏟아졌다. 이 모임은 대구에 있는 고교 영상 동아리 대표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라는 대답이 쏜살같이 나왔고, 그런 고교 동아리는 시내에만 20여개 된다고도 했다. 설마 고교에 영상 동아리가… 하고 미심쩍어 하는 기자의 태도가 불만스러웠는지 볼멘 소리가 이어졌다. "학교서도 방송부만 인정해 주지요, 학생에게 영화가 가당키나 하냐며 지원은 커녕 동아리방도 안 줘요. 너희가 영화를 알기나 하느냐는 식이죠. 학교 축제 때 어렵사리 감상 발표회라도 열면 우스워 하죠. 장비라곤 캠코더 하나에 삼발이 뿐인데 우리 같은 아마추어들이 찍으면 얼마나 찍겠어요? 그러니 학교서는 도와줄 생각도 않죠".

탁자 위의 캠코더는 왠 거냐고 묻자 화원여고 동아리 '일루전'(Illusion) 학생들이 나섰다. "우리 건데요, 작년에 150만원 할부로 사 회원들이 일년을 쫄쫄 굶어 다 갚았어요". 보물단지처럼 캠코더를 만지던 이 학교 손효정(2년)양이 투덜거렸다. "학생들의 영상 제작을 우습게 보기는 어디든 마찬가지입니다. 교실에서는 그래도 친구들이 도와줘서 촬영이 되는데요, 밖에 나오면 백화점이든 식당이든 촬영부터 막고 봐요. 학생이 영화 찍을 리 없다며 괜시리 영업에 해가 될까 얘기도 듣지 않고 못하게 하는 거죠".

그렇게 고달픈 일을 왜 사서 하느냐고 묻자 "좋아서"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영화 감독이 희망이라는 김정우(영남고1)군은 "동아리는 기초와 경험을 쌓기에 최고이자 유일한 통로"라고 했다. 그렇게 모인 학생들이라 일년에 꼭 한두편의 영화는 만든다고 했다.

"제작비요? 20만원 정도면 15분짜리 한편은 만들죠". 편집비가 가장 많이 들어 8만원 정도이고, 나머지는 배우들에게 출연료 대신 밥이나 간식 사주는 비용, 촬영지까지 가는 교통비 등이라고 했다. "배우는 동아리들끼리 서로 지원하죠. 남고에서 제작하면 여고에서 배우를 소개하고, 여고에서 만들면 남학생들이 돕는 거죠". 그러면서도 화원여고생들은 이번에 10만원 짜리 배터리를 사는 통에 제작비가 30만원 넘게 들었다고 울상을 지었다.

이밖에도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했다. 촬영할 시간이 주말과 휴일 뿐이어서 일주일이면 끝낼 분량에도 몇 달씩 걸리기 일쑤. 영화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잘 만들어 보려고 해도 지역에서는 변변히 배울 기회를 찾기 힘들다. 애써 만들었다 해도 학교 축제 때가 고작이고,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상영 공간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이번 청소년 문화 한마당에 영화제(27일 오후 3시 대구 중앙도서관 시청각실)를 기획했다. 출품작은 자그마치 10편. 8개 학교 동아리와 '우리세상'에 있는 연합 동아리 '세상담기'가 참여한다. 자신들이 만든 작품을 상영하는 것은 물론 청소년들이 만든 작품 포스터, 청소년 제작자와의 만남 등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

영상 제작단을 운영하는 '우리세상'의 최해경씨는 "지난달 1일 국채보상공원에서 자신들끼리 청소년 영화제를 연 뒤로 자신감이 붙은 것 같다"고 전했다. 청소년들끼리 기획하고 제작해 영화제를 열기는 그때가 지역에서 처음. 수도권과는 2, 3년 차가 나는 셈이다.

막바지에 김정우군이 한 마디 불쑥 던졌다. "인식도 안 바뀌고 도와주지도 않으니까 사람들이 자꾸 대구를 떠나는 거죠. 영화만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러니 대구에 문화가 없고 청소년들이 즐길 게 없는 거고, 고향을 떠나도 잘 돌아보지 않는 것 아니겠어요?" 고교생들의 8㎜ 카메라에 콘크리트처럼 굳은 대구의 현실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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