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후삼국 격전지 대구의 왕건 행적-(2)도주로

공산전투는 후백제의 견훤에게는 회심의 일전이었지만, 왕건의 고려군에게는 '파군재의 비극'이란 뼈아픈 패배를 기록한 전투였다. 역사학자 류영철(영남대 강사)씨는 고려군이 패한 이유를 '먼 거리를 급히 달려오느라 피로에 지쳤고 경주를 함락한 후백제군에 비해 군량도 부족했던 때문'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대구지역이 견훤의 세력권이어서 더욱 힘든 전쟁이었다는 분석이다.

신숭겸 장군 등의 희생과 계략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왕건은 파군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불로천을 따라 동쪽으로 도주했다. 왕건의 도주로는 대략 지묘동~봉무동~평광동~매여동~안심(반야월)에서 금호강을 건너 수성구 고모동·황금동을 지나 대구 앞산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앞산에서 부터는 주로 사찰의 속전을 중심으로 왕건의 행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팔공산에서 앞산으로 연결되는 왕건의 도주로는 대구 인근에 숱한 지명과 속전을 낳았다. 지묘동 동남쪽 봉무동 산기슭에 왕건이 도망가다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獨座巖)이란 바위가 남아있고, 불로천의 발원지인 평광동의 산아래 마을 속칭 '시량이'도 왕건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시량이는 원래 실왕리(失王里)로 마을 뒷산에서 나뭇군을 만나 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래던 왕건이 잠시후 사라졌다는데, 나중에 그가 왕이었음을 안 마을사람들이 이곳을 실왕리로 부르던 것이 '시량이'로 음이 변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영모재(影慕齋)와 비각이 보존되고 있는데 TV 드라마 방영 이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왕건은 여기서 매여동 방면의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하늘에 반달이 떠서 길을 비춰줬다는 반야월(半夜月),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안심을 했다는 안심(安心)이라는 지명 유래에서 근거한 것이다. 이와 관련 최근에는 안심 일대의 초례봉(醮禮峰·해발 635m)에 이른 왕건이 의관을 수습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속전이 제기되고 있다.

대구대 이명식 교수(역사학)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산이름이 '제사'와 '혼례'의 뜻을 지닌데다 산아래 '신방골'이란 골짜기가 있어 마을 주민들간에는 '왕이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고 혼례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전해오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 대구 앞산까지의 도주로는 연결선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금호강을 건너 고모령~담티고개~황금동 일대를 지나 은적사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비파산 동쪽자락의 은적사(隱跡寺)와 서북쪽의 안일사(安逸寺) 모두 창건유래에 왕건의 자취가 남아있다. 왕건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주로 하천변을 이용하거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산기슭으로 이동했다.

지금의 앞산 순환도로를 따라 상인동의 임휴사(臨休寺)에서 잠시 숨을 돌린 뒤에는 성서지역을 거쳐 낙동강변을 따라 성주쪽으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고려의 세력권이었던 성주에 입성함으로써 왕건은 사직을 보존할 수 있었다. 천운(天運)이었을까. 왕건은 결국 공산전투의 참담한 패배에도 불구, '부처님이 가호하는 영웅'이란 민심을 얻었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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