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0월, 헌법 재판소의 '국공립사대 우선 임용위헌 판결'과 그 소급적용으로 임용을 기다리던 예비 교사 수 천명(당시 전국 9천여 명.현재는 1천500명 정도 남은 것으로 추산)은 날벼락을 맞았다. 임용 날짜만 손꼽아 기다리던 예비 선생님들과 교사로 키우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국공립사범대학에 입학했던 재학생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목표를 잃고 만 것이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물리학과 86학번 장미숙(35)씨, 미발령 교사 완전발령 추진위원회(약칭 미발추) 대구·경북 지부 대표를 맡고 있다. 순진해 보이고, 어딘가 모르게 융통성 없어 보이는 얼굴은 '선생님 냄새'를 물씬 풍긴다. 초.중고등학교를 통틀어 반장도, 학회장도 맡아 본 일이 없는 사람, 대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을 휩쓸던 80년대에도 책가방을 움켜쥔 채 도서관과 집으로 난 길만 오고 갔던 사람, 열심히 공부만 했던 그녀가 어떻게 '미발추 대구.경북지부 대표'라는 엄청난 직함을 가지게 됐을까.
"1990년 10월 8일, 임용고시가 터졌을 땐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어요. 임용고시란 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도 몰랐고요. 같은 과 선배 언니가 차근차근 설명을 할 때까지만 해도 선배가 뭔가 잘못 알고 하는 말인 줄 알았어요".
정부의 법을 믿고 대학에 입학했고, 열심히 공부만 해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그 법이 잘못됐다, 그래서 모두 물리기로 했다'는 통보를 받는다는 것은, 그래서 인생이 엉뚱하게 뒤틀리게 됐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견디기 힘든 일이다.
장미숙씨는 90년 2월 대학을 졸업한 후 교사 발령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난 대기업 따위엔 취업할 생각도 없었다. 설령 취업할 생각을 가졌더라도 곧 발령 받아 떠날 선생님이었기에 기업에서 받아주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임용고시'가 터졌어요. 발령을 2년 이상 기다려온 남자 선배들은 나이제한에 걸려 취업도 할 수 없었지요". 장씨는 1990년 임용고시를 '시행'이 아니라 '터진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해버린 무례하고 무서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난 10년 동안 한번도 임용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잘못된 정책과 타협해 교단에 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창생들간엔 연락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운 좋게 교단에 서게 된 동기들은 그들끼리, 운 나쁘게 남은 이들은 또 그네들끼리 모일뿐이다.'국립 사범대학 나온 거 맞아요?, 왜 선생님이 못 됐어요?, 왜 임용고시를 안 치는 거예요?' 장씨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으레 그런 질문을 던졌고, 그 물음 속엔 '그렇게 공부를 못했어요?'란 비아냥거림을 흉기처럼 숨기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장씨는 자신이 국립 사범대 출신임을 숨기기 시작했다. 임용순위가 학과 내 3위였다는 사실도 부질없었다. 교사니 임용이니 하는 말만 들어도 울화가 목젖까지 차올랐다. 잊어버리려고 무던히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국민과의 약속이었던 법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세상, 땜질 식으로 정책을 시행하는 정부, 그 와중에 희생된 자신들과 죄 없이 피해를 보게 된 중고등 학생들….
"현행 교사 임용시험은 교사의 자질 평가가 아니라 단순히 암기 전문가를 양산할 뿐입니다. 사범대학은 더 이상 대학이 아니라 고시를 앞둔 학원이 돼버렸어요. 어디에서도 아이들을 생각하는 예비교사를 찾아볼 수 없어요".
장씨의 운동은 꼭 교단에 서고 말겠다는 한풀이가 아니다. 평생 선생님의 꿈을 키워온 사람으로서 명백히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일도 교단에 서는 일 못지 않게 사회를 든든히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많은 선배들이 교단에 서기 위해 아직도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임용 시험을 치르면 그만이지만 자신은 잘못된 걸 못 본체하고, 자식들에겐 법을 지키며 살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고 말합니다".
장씨는 정부가 장학금까지 지급하면서 양성한 국립사범대생을 내팽개쳐놓고 지금에 와서 다시 교원수급문제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면, 분노를 넘어 서글픈 마음마저 든다고 말한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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