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불황극복 노력 일본의 섬유도시

일본 섬유산업은 최근 유례없는 전세계적 불황국면에도 나름대로의 경쟁력을 갖춰 대구.경북 섬유산업의 '구조적 불황'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지난 7일부터 12일까지 효고현,고베시, 후쿠이현, 사바에시 등 일본 섬유.패션도시를 둘러본 '대구시의회 일본 섬유도시 견학단'(장정자.이신학.정태성.박성태 의원)은 급변하는 국제환경에 적절히 대응하는 일본의 잠재력에 하나같이 놀라움을 나타냈다.

섬유.패션도시를 모토로 장기 프로젝트를 추진중인 효고현과 고베시, 첨단 신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후쿠이현 섬유업계와 '패션타운' 건립에 민.관이 손을 맞잡은 사바에시. 이를 뒷받침하는 각종 연구소와 패션마트, 상공회의소, 기술센터 등이 일본 섬유산업의 미래를 한층 밝게 비추고 있었다.

박성태 대구시의회 견학단장은 "일본이 고부가가치 및 차별화제품 생산으로 한국, 대만 등을 능가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면서 "그러나 30년전부터 섬유산업의 대대적 구조조정을 토대로 '일본의 밀라노프로젝트'를 꾸준히 추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고 말했다.

대구시의회 견학단의 방문 도시를 중심으로 일본 섬유산업의 오늘과 내일을 짚어본다.

▨일본 섬유산업 개요

일본은 지난 67년부터 '섬유공업구조개선 임시조치법'을 근거로 설비 근대화, 경영규모 슬림화, 연구개발 투자를 통한 신기술.신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이후 80년대 중반부터 엔고, 소비자 수요형태 변화 등에 따른 대불황에 직면해 직기폐기, 다품종 소량생산체제 전환 등 제2의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90년대 중반부터는 섬유산업 정보화와 신마케팅 시스템 도입에 나섰다. 이를 통해 중국의 저가공세와 한국, 대만 등지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는 차별화, 특화, 고부가가치 상품생산으로 경쟁력을 높였다.

그러나 일본 섬유산업도 지난해 하반기부터 불어닥친 미국, 유럽 등 선진국 불경기와 직물공급 과잉, 단가하락 등 악재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최근 2, 3년사이 일본내 미싱 설치대수가 매년 10%씩 줄고 국내 봉제품 출하량이 2001년 기준 전년대비 11% 감소하는 등 봉제업계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 전체 직물생산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북륙산지(후쿠이, 이시카와, 도야마)의 경우 지난해 7월 이후 직물생산량이 지속적으로 줄어 올 상반기 생산량이 지난해보다 5%가량 감소한 반면 수입품은 늘어나 내수경기가 악화되고 있다. 또 지난 한해 동안 일본 국내 공급의류 35억8천점중 수입품이 80% 이상 차지했으며 현재 전체 공급의류중 30% 이상은 불량재고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섬유업계는 품질 경쟁력과 정부 및 자치단체의 지원으로 구조적 불황을 비껴가고 있다.

일본 직물업계는 최근 지속적인 연구개발과 자본투입 등을 통해 다품종 소량생산, 고급 교직물을 비롯한 차별화 제품생산에 주력하는 한편 비의류용(산업용) 제품개발에 전력을 쏟고 있다.

▨일본 섬유도시의 오늘

효고, 고베, 후쿠이, 사바에 등 일본 섬유도시의 공통된 특징은 민-관-연구소의 유기적 협조체계 확립, 자치단체의 장기발전 프로젝트와 업계에 대한 선별적 지원, 업계의 대규모 연구.개발(R&D) 투자 등을 들 수 있다.

지난 95년 6천여명의 희생자를 낸 대지진을 딛고 다시 일어선 효고현과 고베시. 이들 도시는 상당수 직물업체들이 수년전부터 중국 등 해외로 생산거점을 이전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대신 지역 면직물의 일종인 '반슈직물'의 활성화와 패션디자인을 통한 경쟁력 강화, 어패럴 중심도시로의 전환을 통해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효고현청은 지역 반슈직물 육성을 위해 지난 97년 '지역산업집적 활성화법'을 제정, 지난 99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항균, 방취, 전자파 방지 등 고기능성 신섬유 소재개발과 생분해성, 재활용 등 환경친화적 기술개발에 나서는 업체들에 대해서만 지원과 투자를 제한하고 있다는 것. 경쟁력 없고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업체는 자연도태시켜야 한다는게 자치단체의 입장이다.

지난 73년부터 '패션.어패럴도시'를 선언한 고베시의 경우 현재 포토아일랜드, 롯코아일랜드 등 두개 섬을 중심으로 패션산업단지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지난 91년 고베시를 주축으로 고베패션협회, 상공회의소 등이 공동출자해 설립한 '고베패션마트'는 10년동안 상당한 성과를 냈다. 패션업체, 소매업체, IT(정보기술) 업체들이 한 곳에 모이면서 패션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이뤄냈고 10년만에 5명의 걸출한 패션디자이너를 배출했다. 패션마트에 입주했던 이들 디자이너는 유명 브랜드로 성장, 각각 5개의 대형빌딩을 세워 독립했다. 고베시는 이밖에도 패션미술관, 리소스센터 등 하드웨어를 속속 갖춰 패션도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대구지역과 유사한 합섬직물 산지인 후쿠이는 이미 지난 70년대부터 구조조정을 단행해 전체 업체의 30%가량을 퇴출, 현재 품질 경쟁력을 통해 불황의 파고를 이겨내고 있다. 후쿠이현 섬유업계의 경쟁력은 신제품 개발과 다단계생산체제 극복, 판매촉진 시스템 등이다. 임.하청 중심의 다단계 생산구조를 직접생산체제로 바꾸고 차별화 제품생산에 전 업계가 매달리고 있다. 정부와 자치단체도 10년전부터 매년 신제품개발에 1억엔, 마케팅지원에 2억엔씩 지원하고 있다.

신제품 개발에는 후쿠이현공업기술센터와 같은 연구소의 역할이 크다. 직원 88명중 연구인력이 73명인 기술센터는 최근 땀을 방출하는 직기, 컴퓨터를 활용한 자카드 직기, 물대신 탄산가스를 활용한 염색가공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현재 토목.실내장식.의료.건설용 등 산업용 섬유소재 개발에 집중하고 탄소섬유를 활용해 불에 타지 않는 소재도 개발중이다. 자치단체가 기술센터 예산 전액을 지원하고 연구개발과 전문인력 양성에 투자의 초점이 맞춰져 있어 밀라노프로젝트 관련 연구소를 지원하고 있는 대구시가 타산지석으로 삼을만 하다는 것.

또 후쿠이 업계의 강점은 세계적 브랜드이면서도 지역 본사체제를 고수하며 신기술 개발에 전념하는 니카(NICCA)화학 같은 업체에서 잘 나타난다. 세계 8개국에 10개 합병회사를 가진 니카화학은 직원 600명중 연구소 인력만 무려 150명이고 매년 매출액의 7%를 연구개발비로 투입, 섬유제품에 사용되는 발열, 방전, 세척, 염색용 첨단 약품을 개발하고 있다. 야수마샤 에모리 니까화학 대표는 "지역을 터전으로 삼는다는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면서 "고객을 최우선으로 임.직원이 중간역할을 하면서 사장이 밑바닥을 지탱하는 '역피라미드형' 기업구조가 후쿠이업계 발전의 바탕"이라고 말했다.

후쿠이 섬유업계가 소재개발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반면 소도시인 사바에시는 봉제(어패럴)를 중심으로 '패션타운' 건립에 한창이다. 지난해부터 추진한 사바에 패션타운은 '지역기업 상장촉진과 우대제도 확충' '기업들이 모여드는 마을만들기' '신기술.신제품개발 지원사업 확대' '지역브랜드의 종합 쇼핑센터 개설' '첨단기술자 육성' 등을 내용으로 계획수립 기간만 3년을 잡고 있다. 이를 위해 패션타운추진협의회 산하에 '정보.선전' '즐거운 삶 만들기' '도시 만들기' '상품 만들기' 등 5개의 위원회를 두고 있다. 자치단체와 섬유협회 등은 공동으로 신제품 개발에 힘쓰는 전체 업계의 10%를 선별해 집중 지원하고, 수입형 봉제업체의 자체 브랜드화를 유도하고 있다. 특히 사바에섬유협회는 50개 소매상사까지 포함한 210개 회원사가 똘똘뭉쳐 패션타운 건립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일본 섬유의 미래

일본 섬유산업은 장기간의 구조개선을 통해 국제환경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 한국.대만 등 업계가 세계적 불경기에 휘청거리는 최근에도 고부가가치 제품생산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있다.

특히 업계는 조합.협회 등 단체를 중심으로 특유의 단결력을 보여주고 각 연구소는 연구개발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첨단 기술과 제품을 내놓고 있다. 여기에다 정부와 지자체는 자구노력을 기울이는 업체를 선별,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민-관-연구소의 유기적 체계를 확립하고 있다.

일본 정부 및 지자체는 지난해 각각 400억엔 가량의 산업활성화 기금을 출연, 이 기금의 일부 이자를 활용해 신제품개발, 전시회 등에 사용하도록 업계를 측면 지원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직물업계는 매년 국비와 지방비 등 6억엔 가량을 지원받고 있다. 게다가 후쿠이, 효고 등 지역은 도시 전체를 하나의 패션타운, 어패럴타운으로 조성하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모두 사는 길이 곧 내가 사는 길'이란 원칙을 자치단체와 업계가 함께 실천함으로써 일본 섬유산업의 세계화를 실현해 나가고 있다.

조환 한국염색기술연구소장은 "밀라노프로젝트를 추진중인 대구도 짧은 안목으로 눈앞의 이익만 챙길게 아니라 지역 섬유산업의 도약을 위해 업계, 관, 연구소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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