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쌀값 왜 떨어졌나-UR대책 부실

매년 오르기만 하던 쌀값이 올 가을 갑자기 이렇게 뒤뚱거리기 시작한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UR(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었다.

1993년에 타결돼 1995년 적용되기 시작한 그 협상에서 우리나라에 부과된 족쇄 중 하나는 "2004년까지 10년간은 쌀 시장 개방을 유보해 주되 수매대금이 주종을 이루는 정부 보조금은 해마다 770억원씩 줄여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국내 농업 보조금은 1989~91년 사이 연평균 2조2천595억원 규모였고, 1995년엔 2조1천825억원이었으나, 협약에 따라 2004년엔 1조4천900억원으로 감소시켜야 하게 됐다. 올해 집행 가능 액수는 1조7천208억원. 이렇게 되면 수매가를 1995년도 수준으로 동결한다 하더라도 정부 수매량은 매년 줄여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술 더 떠 오히려 수매가조차 해마다 높여 왔다. 쌀 80㎏ 기준으로 1995년 13만2천680원이던 수매가가 올해는 16만7천720원으로 오른 것. 사용할 수 있는 수매 대금 총액은 해마다 줄어드는데 값까지 올려 버리면 수매할 수 있는 분량은 더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 바탕에는 국가 상황보다는 정치적 인기에만 급급한 정치권의 무책임성이 깔려 있다고 농림부 관계자들은 원망했다.

어쨌든 그런 복합적 악재가 겹쳐 정부가 수매할 수 있는 쌀은 1995년 955만섬(2조2천689억원)에서 올해는 575만섬(1조7천386억원)으로 줄어 들었다. 전체 생산량이 3천800만섬이나 되는데 수매량은 이것밖에 안되는 상황이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것은 쌀값 결정권의 시장 이양. 정부가 쌀값을 결정하던 시대는 작년으로써 막을 내리고, 교환가치에 의해 시장에서 값이 결정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UR이 불러 온 문제는 이것뿐도 아니다. 10년간 쌀 시장을 닫아 놔도 좋다고 허용하는 대신 또다른 조건이 제시된 것. 그것은 그 10년 동안 매년 비율을 높여가며 외국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토록 강제된 것이었다. MMA(최소시장 접근) 물량이라 불리는 이 강제 수입량은 국내 소비량을 기준으로 1995년엔 1%(5만1천t, 35만섬), 올해는 2.5%(14만2천500t, 98만3천섬), 2004년엔 4%(20만5천t, 141만섬)로 많아진다.

이 의무 수입쌀로는 지금까지 거의 중국산이 들여져 와 막걸리 등 가공용으로 공급되고 있다. 그때문에 막걸리 원료 시장이 완전히 수입쌀에 넘어 가는 등 국산쌀의 가공용 소비가 설 곳을 잃었다. 우리 쌀 소비처가 그만큼 잠식된 것이다.

나빠진 상황은 국제적인 것만도 아니다. 쌀 소비가 갈수록 줄어드는 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악조건. 1980년에 132.4㎏이나 됐던 1인당 소비량은 20년만인 작년 93.6㎏까지 급감했다. 대신 밀가루 소비는 29.4㎏에서 35.5㎏으로, 육류 소비량은 11.3㎏에서 30.5㎏로 늘었다. 끼니로 환산한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4분의 1을 밀가루 음식으로 먹고 있는 것이다.

쌀이 갖고 있던 비중을 밀가루가 잠식한 데는 오랜 세월에 걸친 계산없는 대처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농정 관계자들의 한탄이다. 경북도청 이태암 농정과장은 "과거 미국의 밀가루 위주 식량 원조 이후 국민들의 입맛이 변했고, 쌀이 부족하던 시절 정부가 분식을 권장한 것이 뒤이어 상황을 고착화시켰다"고 말했다.

더욱이 정부는 밀가루 값을 낮게 책정, 그 선호도를 더 높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일본조차 밀가루 값이 쌀값의 35%에 달하지만 우리는 21%선에서 유통됐다. 밀가루로 하여금 쌀 시장을 잠식토록 부추긴 꼴이라는 얘기.

그렇다면 정부는 쌀 생산량이라도 감축토록 유도해야 할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수매량을 계속 늘림으로써 증산을 촉진시킨 것. 농민들도 UR 이후 100조원에 이르는 UR 대책비가 투입돼 농사가 쉬워지는 한편 소득은 상대적으로 잘 보장되자 쌀 농사로 오히려 더 많이 몰렸다고 경북도청 김치행 농수산국장은 분석했다.

이런 상황은 재고미 누적을 악화시켰고 결국엔 그로 인한 쌀 선호도 하락을 유발했다. 질 나쁜 쌀이 공급되니 소비자들이 쌀 자체를 기피하게 되는 것. 밀가루 식품 맛에 젖어 가는 신세대의 입맛을 바꿔 놓아야 한다고 주목한 사람도 많잖았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젊은층에 큰 영향을 주는 학교.군부대 등 단체 급식에 좋을 쌀을 공급해야 하지만, 그곳에서는 일부러 재고미가 사용됐다. 장기적인 입맛 되돌리기는 아랑곳 않고 우선의 재고미 처리에 급급한 것이었다.

농림부 양곡 유통위원인 민승규 박사(삼성경제연구원)는 "이미 오래 전 다수확과 쌀 재고 등으로 문제점이 예상됐음에도 불구하고 소비 확대책 같은 대비가 부족했다"고 했고, 농촌경제연구원에서 쌀 문제를 연구하는 최세균 박사는 "뒤늦게 가공 확대나 쿠폰제 실시 등 쌀 소비 대책을 마련한다지만 쉽잖은 상황"이라고 걱정했다. 농협 경북본부 황홍달 과장은 "아침밥 먹기 운동 등의 성과도 얼마나 될지 걱정스럽다"고 한숨을 쉬었다.

정인열기자 oxe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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